내 인생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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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이 다가왔다.
옛 고전시인 이상화가 일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망국노의 신세를 한탄하며 "배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표현했듯이 자연의 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느끼는 뭇 사람들의 마음은 천태만상일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주고 온갖 만물에게는 소생의 기쁨을 주는 이 봄을
맞으며 내 인생의 봄에 대하여 새삼스레 느껴본다.
누구나 이 계절이 오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따스한 봄 계절을 맞아 새 싹이 움트는 자연의
아름다운 신비경에 사람들의 마음도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자유세계에 대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안고 대한민국에 탈북 귀순하여 지난 5년간 정착과정이
마치 봄날의 영화화면과도 같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자기의 이상과 꿈이 실현된 현실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지난 5년이었다.
하나원을 갓 수료하고 탈북자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서울시에 임대아파트를 배정받은
나는 눈앞에 흘러가는 화려한 현실의 유혹에 빠져 본의 아닌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야만 했다.
하루는 직업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과정에 집대문 앞 전단지에 쓰여 있는
“월 300보장” 이라는 글에 유혹 되여 먼저 나온 선배탈북여성의 꾀임에 넘어가 다단계에
들어가 정착금으로 받은 300만원을 모두 날릴 뻔했다가 20일만에야 겨우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황금빛의 화려한 유혹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2010년 4월, 나를 찾아온 강북구에 사는 유모씨라는 자는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본인명의로 된
주민등록 인감증명서를 떼여 대포차 한 대를 뽑으면 2억이라는 돈을 받게 해주는데 이 돈을
가지고 캐나다나 원하는 나라로 이민 갔다가 5년이 지난 다음 돌아오면 신용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고 나를 유혹하였다.
2억이라는 소리에 귀가 커진 나는 깊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주민등록 인감증명서를 떼여주고 중고 에쿠스차량 한 대를 3천만원에
본인명의로 구입해주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모든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감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접근하여 어음사기를 빌미로 나의 신용을 더럽힌 사기군들은 2억은 고사하고 에쿠스
차량을 구매해준 대가로 500만원만 쥐어 주며 한국을 떠나라고 강요하였다.
나는 나의 희망과 꿈을 포기하고 낯설고, 피부와 언어, 문화도 서로 다른 캐나다로 떠나가지
않으면 안 되였다.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찾아 밝고 밝은 세상에서 살아보려고 정든 고향을 떠나 28시간의 노를
저어 서해 날 바다로 사투를 벌려 대한민국에 왔건만 온갖 사기에 말려들어 또다시 낯선 나라로
떠나가야만 했던 그 때에는 정말로 많은 눈물로 하소연도 해보았고 돈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깨진 물 사발이 돼버렸으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의 여객기에 몸을 싣고 13시간의 지루한 비행과정을 거쳐 캐나다
토론토에 내린 나는 낯선 영어에 서툴다보니 이민브로커를 하는 한국 사람에게 3천불을 주고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
ISL(난민영어학원)에 가서 영어공부를 하는 대가로 캐나다 연방정부에서 주는 500불에 가까운
기초수급비를 받아 임대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짬 시간을 이용해 알바를 하며 낯선 서방세계에
차츰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민그레션이나 소셜워커에 갈 때에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아 15년전에 한국에서
이민 온 한국연세대학 출신의 실향민 아바이를 데리고 다녀야 만 했다.
나는 새로운 서방사회인 캐나다에 도착하여 이민브로커의 알선으로 거처할 집을 잡고 한국과
낮과 밤이 반대인 시차적응도 할새없이 한주일이 되기도 전에 일자리를 찾아 동해운송이사짐
회사에 취직하였다.
이곳 회사는 한국에서 이민오는 사람들이나 캐나다에서 몇십년 살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짐을 세관을 통관하여 받아 딜레버리(배달)해주는 곳이였다.
나는 이곳에서 시간당 10불을 받으며 차곡차곡 돈을 모아갔다.
이사짐일이 없는 날이면 교차로신문을 보아 인테리어일도 열심히 하며 돈을 벌었다.
인테리어일은 시간당 10불을 받는데 일을 하고 나면 하얀 먼지가루가 온몸을 뒤집어씌워
상대방이 알아보기조차 힘들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퇴근하며 흑인이나 백인들과 어울려 버스에 오르면 육체적인 피로와 이국생활의
서러움으로 하여 눈물을 흘려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하기에 나는 퇴근하여 버스에 오를 때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군 하였다.
차츰 캐나다생활에 적응하여 영어도 좀 배우다나니 스카이 토탈 루핑회사에 취직하여 지붕일을
하는데 도전하였다.
이곳은 다른데 보다는 위험수당이 지급되여 시간당 15불을 받으며 일하였다.
적응이 되여갈 무렵에 이민국으로부터 청문회날자가 잡혀 이민국으로 도착하라는 통지를
받게 되였다. 난민지위를 결정하는 청문회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공인된 3대독재국가이며, 먹을것이 부족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인 되어 청문회를 통과해야만 캐나다 영주권을 신청할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을 떠나올 때 탈북자라는 오명을 벗기 위하여 아무런 신병서류도 구비하지 못하고
탈북하는것만큼 그런 사진과 신분증이 나에게 있을 리 만무하였다. 결과 탈북자난민심사과정을
평가하는 캐나다 연방정부의 청문회에서 탈락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을 떠나 2년만에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하며 차곡차곡 모아둔 돈 보따리를 풀어 세여 보니 3만5천불 이였다.
세계원유생산지이며 나무수출에서 1위인캐나다는 인건비가 한국보다는 높은 편이였다.
그러나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같으며, 병원에 가도 의료서비스가 좋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제일로 좋다.
캐나다는 병원에 가도 무상치료제라 하지만 환자의 병세가 위급해도 온종일 기다려야 병을
보아주는 의료서비스가 매우 한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정말로 말이 통하고 문화가 같은 그립고 그리운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날은 따스한 봄볕이
내리쪼이고 아름다운 꽃이 화창하게 피어나는 지난해 4월말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수소문 끝에 해당한 절차를 밟아 사기군들을 고발하고 파산신청을 하였으며
지금은 국민들의 행복을 나르는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며 재생의 보람과 새로운 삶의 기쁨을
안고 행복하 게 살아가고 있다.
이사과정에 필요 없거나 버리고 가는 집들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중고가전제품과 중고가구들을
수집하여 하나원을 갓 나온 탈북자들이나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 이웃들의 가정을 찾아 직접
배달해주고 나눔을 실천하는 여기에 삶의 보람과 재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하여 날로 발전하는 대한민국 사회가 따스한 봄날을 맞아 더욱더 따스하고 밝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내 인생의 봄,
그렇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온실에서 피어나는 꽃은 자연의 그윽한 향기가 부족하지만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들판에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하다.
나는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와서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들판에 피여난 아름다운 꽃과 같다.
자연의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피여난 한 떨기의 아름다운 꽃처럼 영원히 지지않는 내 인생의
봄을 잘 가꾸고 훌륭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언제나 꾸준히 노력할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인생의 먼 훗날까지도...
* 나의 이 글이 하나원을 금방 나와 대한민국에 정착하는 우리 새터민들의
정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