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우선은 건강이고 둘째는 돈이고 셋째는 삶
댓글 :
18
조회 :
5015
추천 :
1
비추천 :
0
2015.02.12 08:49
북에 있을 때 돈 한 푼 없이 3년동안 살았던 적이 있는데 아주 가능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전생에 죄가 많아 졸지에 아빠를 잃은 딸내미들 넷을 데리고 갈데 없는 외며느리라 홀시어머님과 맏딸이다 보니 친정 어머님도 함께 모시고 살았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고등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밤마다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헤어미용을 해서 강원도 산골이라 돈 대신에 주시는대로 먹을것도 받고 이것 저것 필요 한것들을 받았었습니다.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들도 받다보니 넘쳐나게 비싼 것도 받고 내밀 것이 없는 분은 그냥 미용 봉사도 해주면서 남편 고향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남편이 없는 세대들은 그곳에 살아도 얼마 안되는 가족 공급 외에 본인 기본 공급이 전혀 안되니까 날마다 보는대로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부식물 공급도 식량 공급도 본인 것이 제일 많고, 세대로 나오는 가족 공급은 거의 없었어요.
결국 적은 월급과 퇴근후 허용이 되는 8,3 사업인 헤어를 해서 먹을 것은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함경도에 이사를 가는데 필요한 모든것을 하나 하나 장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이면 밭에 가서 아침 시간이 될 때까지 일하다가 시간이 되면 집에 와서 일곱 식구가 한상에 둘러 앉아 두 어머님이 차려 주시는 아침을 먹고 학교로 출근하는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산을 일구어서 옥수수, 수수, 콩 팥, 조이, 기장, 감자는 물론이고 고구마 떡호박에 들깨, 참깨, 채소와 과일까지 다 집에서 심어 먹었죠.
오후에 퇴근하면서는 시어머님이 메고 오신 미용사 가방을 받고 퇴근하는 가방을 시어머님께 드리고 애를 업고 오시면 뽀뽀 한번 해 주고 20~30 십리 길을 가서 헤어 미용을 해주고 밤 12시에 일 마치고 길에 나서서 집에 오느라면 늘 시어머님이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항상 제 짐을 나누어 지시고 집에 가군 하였는데 짐이 크면 수고 했다고 이마에 내 땀을 닦아 주시면서 눈물이 굴썽해 지시군 하셨구요,
짐이 적어서 내가 너무 미안해 하면 계속 무겁게 지고 다닌다고 오늘은 좀 쉬라고 한다시면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시던 시어머님!
내가 지금 딱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시어머님이 너무 감사하고 남편을 대신하여 정말 고마운 내 삶의 은인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들없는 며느리 집에서 내 딸내미들을 돌보시랴, 농사도 하시랴, 자기 방식대로 애들 키운다는 괴벽하신 (친정 어머님) 사돈 비위까지 맞춰가시면서 묵묵히 살아 오신 시어머님!
우리시어머님 같으신분 아마도 그 시대라 가능했지 현재나 미래에는 이런분 세상에 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속옷부터 신발까지 (큰빨래만 내가 하고) 다 시어머님과 친정 어머님이 하셨거든요.
돈 벌어오고 먹을 것을 보충해오고, 필요 한 물건들은 제가 다 구입해왔구요,
두어머님이 온갖 집알 살림에 애들 키우시는 일까지 다 맡아 하셨으니 제가 두 어머님을 모신것이 아니라 두 어머님이 저를 아니 며느리와 딸 내미를 신주 모시듯 모시고 살았다고 해야 아마도 말이 될 듯합니다.
암튼 고난의 행군 초기라 돈은 없고 순수 농사를 해서 소금 한 가마니 사서 독에 넣고 몇년 동안 모든것은 농사 해서 먹고 입을 것과 쓸 것은 파마를 해서 구입해서 살았었던 것 같습니다.
돈? 만져 볼 일도 별로 없었거니와 있는 돈도 2년 넘도록 외지에 나가지 않다 보니 쓸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큰 애가 유치원에 가는데 북한은 학교나 유치원에 가도 돈 내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산골 학교는 돈 쓸 일이 정말 없거든요.
평양서 장사차가 오면 농사 해서 고추랑 낟알로 바꾸어 입고, 쓰고, 또 신고, 살았구요?
학년 마다 몇 안돼는 학생들은 농장 관리위원회나 당 위원회에서 다 도와주다보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돈 별로 만져 본 기억이 없었네요.
그런데 이사를 가자니 시집 올 때 그렇게 귀하게 마련해 왔던 비싼 비단 이불들이며 집안 가장 집물들 하나 하나 교환 하거나 신세 많이 진 분들께 독이랑 큰 물건들을 드리고 주시는 돈으로 차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 되니 네 딸내미가 자기 배낭 하나씩 메고 길 떠날 차비가 다 되더군요.
그 기간에 시어머님은 어느날 산에 가셔서 산나물을 마대 배낭에 하나 가득 지고 오신것이 너무 무리 하셨는지 밤에 주무시다가 뇌출혈 하시면서 쓰러지셔서 군의장을 모셔 왔는데 5시간만에 끝내 새벽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친정 어머님이 너무 슬퍼하시면서 매일 산소에 가시길래 제가 차비를 마련하여 인근에서 평양 견학 가는 차에 평양 이모님들께 잠시 나들이 보내 드리고 애들만 데리고 배낭 하나씩 지고 한 많은 강원도를 떠나 회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마식령 고개에서 차가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차가 바람나서 대형 사고가 났습니다.
남자들은 무작정 마구 뛰어 내리다 보니까 죽은 사람들이 더 많고 산 사람이 훨씬 더 적었죠.
군인들과 젊은 사람들은 처음에 운전 조수의 웨침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렸지만 아녀자와 노인들은 차에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무도 누운듯이 보이면서 획 획 날아가던 차가 긴 올리막에 다달으니 속도가 그래도 늦어지면서 결국 벼랑 꼭대기에 바람벽을 치면서 앞 범퍼가 거의 뭉개지면서 차가 서는데,
그 힘이 또한 얼마나 센지 죽을 힘을 다해 꼭 그러 안은 우리 식구들은 튀어 올랐다가 아이는 도루 차 위에 다시 떨어 졌고, 나는 업은 애기와 셋째를 꼭 껴 안은채 차 옆 누가 해 놓은 나무단 무지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막내가 겨우라도 걸을 수 있을 때라 다행이었습니다. 사흘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강원도 도립병원이더군요.
뇌진탕에 장파열이라고 진단이 나왔구요, 사고난 여러 사람을 함께 싣고 가다보니까 내 피보다 병원에 실려 갈 때 옆의 사람들 피가 더 많이 내옷에 뭍었었던가 봐요.
담가에 실어서 졍형 외과도 갔다가 심혈관 내과에 갔다가 결국 내과에 입원 했다그러데요?
이동중에 차 사고났으니 그 지역 사람이 아니더라도 돈 내는 법은 없어 입원 치료는 되는데 내 밥만 나오니까 우리 애들이 내 밥을 나누어 먹고 배낭에 있는 날식량으로 큰 애가 주는 만큼씩 생 쌀알을 꼭꼭 씹어 먹으면서 끼니를 에우고 있더군요.
고난의 행군 시기라도 그래도 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식구들 병문안 오셔서 먹을 것을 조금씩 주기도 하긴 했습니다만
큰 딸내미만은 내 곁에서 아무것도 안먹다 시피하고 엄마가 죽을까봐 우리 어머니 살려 달라고 울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네요,
눈을 뜨고 보니 한참 후에 큰 딸내미가 막내 딸을 안고 내 얼굴 앞에서 울고 있더군요.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살아 있다는 것과 어린 막내가 닦아 주는 눈물과 함께 차거운 고사리 손가락에 힘을 얻었죠.
약도 잘 받아 먹고 주사도 맞으면서 나보다도 내 주위 땅바닥에서 자는 애들 때문에 치료를 받고 걸을만하게 되자 얼마후 퇴원을 하여 애들이 내 짐까지 나누어지고 나만 빈 몸으로 지팡이에 의지하여 기차를 타고 남편 고향으로 갔습니다.
시아버님은 고난의 행군 이듬해에 돌아 가셨고, 시어머님을 강원도 땅에 뭍고 길 떠나서 찾아간 남편 고향,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반겨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집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있었고 나는 발길을 돌려 여관에 애들을 두고 시당에 찾아가서 서류를 접수 하고 인민위원회에 가서 집도 신청하고 이런 저런 수속을 마쳤습니다.
오롱 조롱 어린 애들 넷이라면서 집울 우선 줄테니까 기다리라네요.
여관에 임시 있으라고는 하는데 낮에는 비워주었다가 저녁에 신분증 검사 하고 여행증에 도장 매일 받으면서 차거운 방에 들어가는게 아주 부담 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장마당에서 알게 된 국수 파시는 걸음이 불편하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여 두분 식사를 해결해 드리기로 하고 그 집 웃방을 빌렸습니다.
"아코디언 첼로, 과외 합니다" 간판을 붙이고 바로 다음날 오후에 첫 과외 학생이 왔습니다.
장마당부터 소문이 나면서 다음날부터 하루에 몇명씩도 오면서 학생 수가 잠깐 사이에 20명이 되어 돈도 벌고 먹을 것도 생기고 두달이 넘으니 집을 준다고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주택 담당 지도원하고 산업동에 가보니 제대군관 아파트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쏟아 지더군요.
창문도 없고 문은 벽에 기대어 놓아 달려 있지 않구요, 복도나 바닥은 세멘 기초 투성이더군요.
일하시는 분들에게 식사도 사드리고 술도 한 병씩 사 드렸더니 우리집을 먼저 해 주시더군요.
돈이 많아 자재가 제 때에 보장 되면 더 빠를 것을 나라에 재정이 돌지 않아 쉬는 날이 많으니 또 한달 거의 걸려서 시멘트 미장을 하고 닷새만에 푹 젖은 집 그래도 새집에 들어 갔습니다.
종이 박스를 깔아 놓으면 얼마 안지나서 푹 푹 젖어 나가더군요.
그래도 내집이 좋았고요, 큰 방이 둘이고 작은 방이 하나에 전실도 크고 부엌도 괜찮았어요.
그렇게 아코디언 교습이 나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땅에 와서 작년에 지방에 내려가 일하자니 집부터 구해야 하고, 결국 돈, 돈이 모라자서 또 다시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하였습니다.
여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돈 입니다. 눈뜨면 마시는 물부터 잘 때 켜는 난방비까지 사는 것 모두가 돈이 있어야 합니다.
북에 있을 때는 산에 가서 땔 나무를 미리 해 놓으면 잘 마른 삭정이로 돈 안들이고 불도 땠었는데 여기는 건강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삶이라는 단어가 생성이 됩니다.
단돈 27만원을 쥐고 잘 곳이 없어 네거리에 서서 동서남북 헤매던 2013년 5 월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내 학원도 생기고 따듯한 집도 생겼습니다.
달달이 들어가는 돈만 해도 200 이 훨씬 넘습니다. 힘들지만 저는 그렇게 하나씩 장만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달달이 보증금을 주기로 하고 방을 얻는데 그렇게라도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돈이 집이 되어주더군요.
학원 건물에 보증금 1000 만원, 인테리어 값도 많이들고, 올 1월에 마련한 월세집이 또 보증금 천만원이고, 틈틈히 사놓은 악기도 700 만원이니 이제는 하나 하나 내것이 생기네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학원 학생들이 20명을 넘어 섰습니다. 그게 너무도 감사 한거죠.
단돈 27만원에 손가방 하나 들고 지방에 내려와서 이제는 집안에 없는것 없이 다 해놓고 삽니다. 연애나 하고 시간을 빼았겼더라면 아마 지금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시간이 돈인 세상이기에 가능하고 노력하면 뭐든지 되는 이 땅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겨울 추운 집에서 감기를 50일 넘게 앓으면서 주사에 약에 신경성 위염까지 와서 죽을 먹으면서 고생도 해보니 우선 건강이 첫째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아파도 편히 아플수 없이 바삐 사는 인생, 어쨋거나 아파도 돈이 있어야 주사도 맞고, 약도 사먹고, 일도 합니다.
그러니 건강 다음은 돈 그리고 가족, 그 다음이 사랑도 있고 여행도 모든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혹여 이렇게 집 먼저 정하고 보증금 넣으면서 돈 모으며 사는 것이 도움이 되실지 몰라 일단 올려 봅니다.
울님들 항상 건강하시고요 좋은 일들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전생에 죄가 많아 졸지에 아빠를 잃은 딸내미들 넷을 데리고 갈데 없는 외며느리라 홀시어머님과 맏딸이다 보니 친정 어머님도 함께 모시고 살았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고등중학교 교사를 하면서 밤마다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헤어미용을 해서 강원도 산골이라 돈 대신에 주시는대로 먹을것도 받고 이것 저것 필요 한것들을 받았었습니다.
먹을 것과 필요한 물건들도 받다보니 넘쳐나게 비싼 것도 받고 내밀 것이 없는 분은 그냥 미용 봉사도 해주면서 남편 고향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남편이 없는 세대들은 그곳에 살아도 얼마 안되는 가족 공급 외에 본인 기본 공급이 전혀 안되니까 날마다 보는대로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부식물 공급도 식량 공급도 본인 것이 제일 많고, 세대로 나오는 가족 공급은 거의 없었어요.
결국 적은 월급과 퇴근후 허용이 되는 8,3 사업인 헤어를 해서 먹을 것은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함경도에 이사를 가는데 필요한 모든것을 하나 하나 장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벽이면 밭에 가서 아침 시간이 될 때까지 일하다가 시간이 되면 집에 와서 일곱 식구가 한상에 둘러 앉아 두 어머님이 차려 주시는 아침을 먹고 학교로 출근하는것이 참 행복했습니다.
산을 일구어서 옥수수, 수수, 콩 팥, 조이, 기장, 감자는 물론이고 고구마 떡호박에 들깨, 참깨, 채소와 과일까지 다 집에서 심어 먹었죠.
오후에 퇴근하면서는 시어머님이 메고 오신 미용사 가방을 받고 퇴근하는 가방을 시어머님께 드리고 애를 업고 오시면 뽀뽀 한번 해 주고 20~30 십리 길을 가서 헤어 미용을 해주고 밤 12시에 일 마치고 길에 나서서 집에 오느라면 늘 시어머님이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항상 제 짐을 나누어 지시고 집에 가군 하였는데 짐이 크면 수고 했다고 이마에 내 땀을 닦아 주시면서 눈물이 굴썽해 지시군 하셨구요,
짐이 적어서 내가 너무 미안해 하면 계속 무겁게 지고 다닌다고 오늘은 좀 쉬라고 한다시면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시던 시어머님!
내가 지금 딱 그 나이가 되고 보니 시어머님이 너무 감사하고 남편을 대신하여 정말 고마운 내 삶의 은인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들없는 며느리 집에서 내 딸내미들을 돌보시랴, 농사도 하시랴, 자기 방식대로 애들 키운다는 괴벽하신 (친정 어머님) 사돈 비위까지 맞춰가시면서 묵묵히 살아 오신 시어머님!
우리시어머님 같으신분 아마도 그 시대라 가능했지 현재나 미래에는 이런분 세상에 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속옷부터 신발까지 (큰빨래만 내가 하고) 다 시어머님과 친정 어머님이 하셨거든요.
돈 벌어오고 먹을 것을 보충해오고, 필요 한 물건들은 제가 다 구입해왔구요,
두어머님이 온갖 집알 살림에 애들 키우시는 일까지 다 맡아 하셨으니 제가 두 어머님을 모신것이 아니라 두 어머님이 저를 아니 며느리와 딸 내미를 신주 모시듯 모시고 살았다고 해야 아마도 말이 될 듯합니다.
암튼 고난의 행군 초기라 돈은 없고 순수 농사를 해서 소금 한 가마니 사서 독에 넣고 몇년 동안 모든것은 농사 해서 먹고 입을 것과 쓸 것은 파마를 해서 구입해서 살았었던 것 같습니다.
돈? 만져 볼 일도 별로 없었거니와 있는 돈도 2년 넘도록 외지에 나가지 않다 보니 쓸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큰 애가 유치원에 가는데 북한은 학교나 유치원에 가도 돈 내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산골 학교는 돈 쓸 일이 정말 없거든요.
평양서 장사차가 오면 농사 해서 고추랑 낟알로 바꾸어 입고, 쓰고, 또 신고, 살았구요?
학년 마다 몇 안돼는 학생들은 농장 관리위원회나 당 위원회에서 다 도와주다보니 고난의 행군 시기에 돈 별로 만져 본 기억이 없었네요.
그런데 이사를 가자니 시집 올 때 그렇게 귀하게 마련해 왔던 비싼 비단 이불들이며 집안 가장 집물들 하나 하나 교환 하거나 신세 많이 진 분들께 독이랑 큰 물건들을 드리고 주시는 돈으로 차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이 되니 네 딸내미가 자기 배낭 하나씩 메고 길 떠날 차비가 다 되더군요.
그 기간에 시어머님은 어느날 산에 가셔서 산나물을 마대 배낭에 하나 가득 지고 오신것이 너무 무리 하셨는지 밤에 주무시다가 뇌출혈 하시면서 쓰러지셔서 군의장을 모셔 왔는데 5시간만에 끝내 새벽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친정 어머님이 너무 슬퍼하시면서 매일 산소에 가시길래 제가 차비를 마련하여 인근에서 평양 견학 가는 차에 평양 이모님들께 잠시 나들이 보내 드리고 애들만 데리고 배낭 하나씩 지고 한 많은 강원도를 떠나 회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길에 마식령 고개에서 차가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차가 바람나서 대형 사고가 났습니다.
남자들은 무작정 마구 뛰어 내리다 보니까 죽은 사람들이 더 많고 산 사람이 훨씬 더 적었죠.
군인들과 젊은 사람들은 처음에 운전 조수의 웨침 소리를 듣고 뛰어 내렸지만 아녀자와 노인들은 차에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나무도 누운듯이 보이면서 획 획 날아가던 차가 긴 올리막에 다달으니 속도가 그래도 늦어지면서 결국 벼랑 꼭대기에 바람벽을 치면서 앞 범퍼가 거의 뭉개지면서 차가 서는데,
그 힘이 또한 얼마나 센지 죽을 힘을 다해 꼭 그러 안은 우리 식구들은 튀어 올랐다가 아이는 도루 차 위에 다시 떨어 졌고, 나는 업은 애기와 셋째를 꼭 껴 안은채 차 옆 누가 해 놓은 나무단 무지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막내가 겨우라도 걸을 수 있을 때라 다행이었습니다. 사흘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강원도 도립병원이더군요.
뇌진탕에 장파열이라고 진단이 나왔구요, 사고난 여러 사람을 함께 싣고 가다보니까 내 피보다 병원에 실려 갈 때 옆의 사람들 피가 더 많이 내옷에 뭍었었던가 봐요.
담가에 실어서 졍형 외과도 갔다가 심혈관 내과에 갔다가 결국 내과에 입원 했다그러데요?
이동중에 차 사고났으니 그 지역 사람이 아니더라도 돈 내는 법은 없어 입원 치료는 되는데 내 밥만 나오니까 우리 애들이 내 밥을 나누어 먹고 배낭에 있는 날식량으로 큰 애가 주는 만큼씩 생 쌀알을 꼭꼭 씹어 먹으면서 끼니를 에우고 있더군요.
고난의 행군 시기라도 그래도 좀 있는 사람들이 자기 식구들 병문안 오셔서 먹을 것을 조금씩 주기도 하긴 했습니다만
큰 딸내미만은 내 곁에서 아무것도 안먹다 시피하고 엄마가 죽을까봐 우리 어머니 살려 달라고 울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네요,
눈을 뜨고 보니 한참 후에 큰 딸내미가 막내 딸을 안고 내 얼굴 앞에서 울고 있더군요.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르고, 살아 있다는 것과 어린 막내가 닦아 주는 눈물과 함께 차거운 고사리 손가락에 힘을 얻었죠.
약도 잘 받아 먹고 주사도 맞으면서 나보다도 내 주위 땅바닥에서 자는 애들 때문에 치료를 받고 걸을만하게 되자 얼마후 퇴원을 하여 애들이 내 짐까지 나누어지고 나만 빈 몸으로 지팡이에 의지하여 기차를 타고 남편 고향으로 갔습니다.
시아버님은 고난의 행군 이듬해에 돌아 가셨고, 시어머님을 강원도 땅에 뭍고 길 떠나서 찾아간 남편 고향,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반겨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집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있었고 나는 발길을 돌려 여관에 애들을 두고 시당에 찾아가서 서류를 접수 하고 인민위원회에 가서 집도 신청하고 이런 저런 수속을 마쳤습니다.
오롱 조롱 어린 애들 넷이라면서 집울 우선 줄테니까 기다리라네요.
여관에 임시 있으라고는 하는데 낮에는 비워주었다가 저녁에 신분증 검사 하고 여행증에 도장 매일 받으면서 차거운 방에 들어가는게 아주 부담 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장마당에서 알게 된 국수 파시는 걸음이 불편하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여 두분 식사를 해결해 드리기로 하고 그 집 웃방을 빌렸습니다.
"아코디언 첼로, 과외 합니다" 간판을 붙이고 바로 다음날 오후에 첫 과외 학생이 왔습니다.
장마당부터 소문이 나면서 다음날부터 하루에 몇명씩도 오면서 학생 수가 잠깐 사이에 20명이 되어 돈도 벌고 먹을 것도 생기고 두달이 넘으니 집을 준다고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주택 담당 지도원하고 산업동에 가보니 제대군관 아파트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쏟아 지더군요.
창문도 없고 문은 벽에 기대어 놓아 달려 있지 않구요, 복도나 바닥은 세멘 기초 투성이더군요.
일하시는 분들에게 식사도 사드리고 술도 한 병씩 사 드렸더니 우리집을 먼저 해 주시더군요.
돈이 많아 자재가 제 때에 보장 되면 더 빠를 것을 나라에 재정이 돌지 않아 쉬는 날이 많으니 또 한달 거의 걸려서 시멘트 미장을 하고 닷새만에 푹 젖은 집 그래도 새집에 들어 갔습니다.
종이 박스를 깔아 놓으면 얼마 안지나서 푹 푹 젖어 나가더군요.
그래도 내집이 좋았고요, 큰 방이 둘이고 작은 방이 하나에 전실도 크고 부엌도 괜찮았어요.
그렇게 아코디언 교습이 나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땅에 와서 작년에 지방에 내려가 일하자니 집부터 구해야 하고, 결국 돈, 돈이 모라자서 또 다시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하였습니다.
여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돈 입니다. 눈뜨면 마시는 물부터 잘 때 켜는 난방비까지 사는 것 모두가 돈이 있어야 합니다.
북에 있을 때는 산에 가서 땔 나무를 미리 해 놓으면 잘 마른 삭정이로 돈 안들이고 불도 땠었는데 여기는 건강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삶이라는 단어가 생성이 됩니다.
단돈 27만원을 쥐고 잘 곳이 없어 네거리에 서서 동서남북 헤매던 2013년 5 월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내 학원도 생기고 따듯한 집도 생겼습니다.
달달이 들어가는 돈만 해도 200 이 훨씬 넘습니다. 힘들지만 저는 그렇게 하나씩 장만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달달이 보증금을 주기로 하고 방을 얻는데 그렇게라도 나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돈이 집이 되어주더군요.
학원 건물에 보증금 1000 만원, 인테리어 값도 많이들고, 올 1월에 마련한 월세집이 또 보증금 천만원이고, 틈틈히 사놓은 악기도 700 만원이니 이제는 하나 하나 내것이 생기네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학원 학생들이 20명을 넘어 섰습니다. 그게 너무도 감사 한거죠.
단돈 27만원에 손가방 하나 들고 지방에 내려와서 이제는 집안에 없는것 없이 다 해놓고 삽니다. 연애나 하고 시간을 빼았겼더라면 아마 지금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시간이 돈인 세상이기에 가능하고 노력하면 뭐든지 되는 이 땅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겨울 추운 집에서 감기를 50일 넘게 앓으면서 주사에 약에 신경성 위염까지 와서 죽을 먹으면서 고생도 해보니 우선 건강이 첫째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아파도 편히 아플수 없이 바삐 사는 인생, 어쨋거나 아파도 돈이 있어야 주사도 맞고, 약도 사먹고, 일도 합니다.
그러니 건강 다음은 돈 그리고 가족, 그 다음이 사랑도 있고 여행도 모든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혹여 이렇게 집 먼저 정하고 보증금 넣으면서 돈 모으며 사는 것이 도움이 되실지 몰라 일단 올려 봅니다.
울님들 항상 건강하시고요 좋은 일들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