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만나는 특별한 날들
11월 11일이었다. 아침에 출근 하니 모두들 이날이 빼빼로데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빼빼로데이가 무언지 물어 보았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것도 모르는가하는 눈치로 쳐다보았다. 남한사회에 정착한지 오래지 않으니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빼빼로 데이라는 날이 생긴 유래를 알려 주면서 오늘 애인이 있으면 초콜렛을 주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좀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별난 날도 다 있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저녁에 퇴근했다. 물론 초콜렛을 살 궁리는 하지도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한참 가는 데 전화가 왔다. 여자 친구다.
그런데 하는 말이 자기한테 줄 초콜렛을 샀는가 한다. 남한생활을 갓 시작했는데 언제 그런 건 다 알아가지고 벌써부터 그런데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괜히 약간 짜증이 났다.
여자들이 남한사회에 더 빨리 정착한다더니 이런 걸 먼저 깨달아 간다는 말인가,
괜히 허영에 떠서 분수에도 맞지 않는 취미와 가치관부터 먼저 자리 잡으면 어떻게 해,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것에 민감하지 말고 남한사회에 필요한 경쟁력이나 키워라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꿀꺽 넘겼다. 어쨌건 그가 앵돌아지는 것은 막아야겠기에 나는 이렇게 둘러쳤다.
“그건 말이야, 고등학생들이 하는 놀음이라고, 일부 성인들이 그러는 것은 다 고등학교시절을 추억하느라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만 불과 이틀 만에 나의 거짓말은 들장 나고 말았다.
사실 남한사회에 와서 보니 무슨 명절이나 빼빼로데이, 만우절 같은 특별한 날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이로 하여 다소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일도 있었다.
만우절에 있은 이야기다.
어느 한 민간언론에서 기자로 일하는 한 탈북자가 만우절 아침 출근길에서 전화를 받았다. 남한에 입국한지 얼마 안 되는 같은 고향에서 온 후배였다.
그는 자기가 북한에 있는 친구들과 방금 전화통화를 가졌는데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소 북한소식을 다루던 탈북자기자에게는 귀가 솔깃해 지는 말이었다.
소식인즉 지난밤 압록강기슭에 있는 북한의 한 국경도시에서 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은 지 얼마 안 되어 요란한 폭음이 울리더니 도시중심에 있는 김일성의 동상이 파괴되었단다. 누구의 소행인지 범인을 붙잡지는 못했으나 동상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몸체가 크게 기울어져 당장 넘어지게 되었으며 주위의 숲에 불이 당겨 큰 소동이 났다면서 이 소식을 다른 곳에서 보도하기 전에 빨리 먼저 보도하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아주 멋지게 꾸며낸 만우절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들은 사람이 문제였다. 그는 요란한 뉴스거리에 심취되어 그날이 거짓말을 하는 만우절임을 망각해 버렸다. 그는 허둥지둥 직장에 들어서기 바쁘게 이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그의 말에 전 직원이 비상이 걸렸다. 북한소식통에 제일 빠르고 정확한 것으로 인정 된 그의 말에 모두가 만우절을 고려하지 않았다. 각자가 자기의 정보라인을 가동시켜 확인에 들어갔다.
완전한 거짓임이 확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으며 그 때문에 전 직원의 업무에 큰 차질이 생겼다.
망신만 당하고 꾸중을 들은 그 기자는 너무 화가 나 후배에게 야단 쳤다. 그렇지만 후배는 오히려 흡족하여 한국에 먼저 온 사람이 왜 만우절도 몰라 당하냐며 익살을 부렸다.
전날 저녁 남한친구와 술을 마셨는데 그가 내일이 거짓말을 잘해야 하는 만우절임을 알려 주어 그랬다는 것이다.
갑자기 맞다 들린 낯선 문화를 여과 없이 무작정 받아들이게 될 때 이런 부작용은 언제든 생길 것이다.
북한은 명절이 가장 많은 행복한 나라가 북한이라고 선전한다.
수령우상화와 같은 이념을 중시하는 사회다보니 다른 나라에는 없는 명절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속명절들인 음력설, 대보름, 단오, 추석 외에 양력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과 4월 15일, 인민군창립일 4월 25일, 국제노동절 5월 1일, 소뎐단창립일 6월 6일, 김일성청년동맹창립일 1월 19일, 국제 아동절 6월 1일,광복절 8월15일, 청년절인 8월 28일, 노동당의 창립일인 10월 10일, 국경절 9월9일, 김정일의 생모생일 12월24일을 비롯한 수많은 기념일들이 있다.
반면 북한에는 남한이나 국제사회에서 공통으로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일이 없다. 또 빼빼로데이나 만우절,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 없다.
수령절대주의 독재를 우상화하는 데 필요한 날들이 거의 전부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순수한 정서, 세태를 위한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별로 없어 북한주민의 생활에는 상대적으로 향과 즙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오래 동안 살아 온 탈북자들이 앞에서 말한 빼빼로데이나 만우절 이야기와 같은 낯선 남한문화의 체험을 통해 감지하고 있는 남북의 차이는 통일문화연구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