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북한생활

나의 북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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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망 고난의행군

사회주의제도 에서 국가에서 주는 배급 으로 살림을 해나가던 우리 집 에는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다,  김일성의 사망이후 국가에서 배급을 탈수(받을수)가 없게 되자 많은 사람 들은 직장을 관두고 장사의 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록 간부를 했어도 너무도 고정하여 부정부패 라는것 을 모르셨던 나의부모님 들은 장사도 못하고 그냥 한끼 한끼 잘사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죽지못해 살아가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자식들과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전선에 오르게 되었다 어머니가 교단에 서야 할 때면 어머니가 다니셨던 식량 전선 길 을 큰언니와 작은언니가 대신해 나갔다,

 이렇게 "고난의 행군"은 계속 되였고 죽음을 맞받아 나가는 우리들에게는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사기군의 말에 속 히 여 눈이 오는 눈길을 차도 없이 그것도 맨발로 100 리를 걸어야 했다, 그렇게 조금 걷고 나니 발바닥이 얼어서 발에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걷는 발자국은 발자국이 아닌 피 자국 이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냥 지나 갈수 가 없어 자기 집 으로 언니들은 데려가 밥도 먹여주고  몸도 녹여 주었다.

 또 어떤 날은 장진으로 감자를 구하려 먼 길을 걸었고 밭 에서 주은 감자를 배낭 안 에 넣고 배가 고파도 온전한 감자알은 집에 가서 가족들과 같이 먹으려고 아끼고 땅 우 에 해빛 을 받아 시퍼렇게 독이 밴 잔 감자알 만 구워먹다가 큰 봉변도 당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배 고파 허덕이는 나를 보고 “ 막내야 너 정 배가 고프면 비료공장에 가 비료라도 훔쳐 팔아먹고 죽지 말고 살아라” 고 하셨다 한창 이쁜나이에 학교에서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펴야 했던 나는 이렇게 비료공장에서 비료 덮치개가 되여 용액장의 비료를 목표로 생명으로 여기고 하루하루를 강하게 이겨 나갔다, 처음 성공한 비료를 팔아 번돈으로 장마당에 가보니 우리에게 수학을 가르치시던 선생님이 건빵을 파는것이였다,

 “나라의 귀중한 인재들을 키워야 할 교육자들이 장마당에서 건빵이나 팔면 나라의 흥망문제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괴로운 생각과 스승들의 가슴아픈 현실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어 나는 스스로 그 교육자의 건빵을 있는 돈 어치 만큼 을 다 샀다,

 그 많은 건빵들을 다 먹고 배를 채운 다음 다시 용액장으로 돌입(북한에서는 어디로 향해 들어가는것을 꽃제비들은 “돌입”이라고한다) 해 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비료덤치개를 오래하니 나에게는 조금씩 돈을 손에 쥐기 시작했다 하루는 비료를 금방 팔고 나오는데 큰언니가 나타나서 “막내야 비료해서 돈 좀 벌었니? 지금 집에서 가족들이 굶고 있으니 돈 있으면 나 좀 줘 국수라도 사서 집에 가져가게”하는것 이였다,

 돈을 손에 쥐기 바쁘게 언니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니 철 없던 내가 발칵 성을 내자 마음어진 언니는 우는 것 이였다 우는 언니를 보니 내 가슴 은 아팠다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나한테 왔을까? 나는 큰언니에게 “ 언니 언니 여기서 먹고 싶은거 있으면 다 먹어라 돈은 내가 낼게” 하자 언니는 “집에서 다 굶고 있으니 난 국수 한 그릇만 먹겠다 그러니 돈 좀 줘 ”하는 것 이였다, 언니라고 왜 장마당 음식들이 먹고싶지 않으랴! 하지만 집에서 굶고있는 식구들을 생각해서 아무것도 안 먹고 내가 준 돈으로 집으로 들어간적도 있었다,

장마당에서 빵을 팔던 작은 언니는 배가 고파 빵을 다 먹어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집에서 쫒겨 나서 언니도 비료 덤 치개 가 되어 나와 작은 언니는 돈 을 벌면 집 으로 갔다 우리가 돈 벌어 오면 아버지 는 어린우리가 돈을 벌어 온다고 우리 옷 을 밤새 빨아놓으셨다 범 같은 아버지 도 우리가 돈 벌어 오면 마음이 아프신 모양 이였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빨아 말려준 배 차기 옷 을 입고 다시 비료공장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무들이 나타나면 나는 꽃제비 차림이 넘 부끄러워 피한적도 한 두 번 이 아니다,

 그때 당시 우리는 비료를 하면 돈이 아까워 장마당 에 가서 빵 대신 배를 채 울수 있는 마른 국수 를 사서 두부와 함께 끓어먹었다

 비료공장 정문 대도로 길 을 따스한 깔개 삼고 밤하늘의 별을 천정으로 여기고 지나가는 자동차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잠을자며 나는 이렇게 비료 덤치개로 살아갔다

 

 

막냉이

이 게시물에 달린 코멘트 9
예다움 2009.03.17 11:07  
정말 한분 한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했던 고생은,상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생각을 가져 봅니다.상처의 크기도 가지가지 겠지만 그런 상처와 고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더 성숙되여 가는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아픈 상처 용기와 희망으로 바꾸어 더 힘차게 열심히 삽시다.화이팅!
두만강 2009.03.17 22:59  
한계가 있었던 우리들의 북한생활 되돌아보는 심정 너무도 ㅗ힘드네요 좋은글 보고갑니다
착한여왕 2009.03.21 07:37  
나죠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북한 분들 중 그 누구도 잊을수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꼭 대박나시고 부자되세여 ^^
복수여자 2009.04.03 14:41  
저의어머니도 그렇게 굶으시면서 그 곤난에서 우리 네자매를 구하셨어요 엄마사랑 이 그리워져요
컴퓨터사랑 2009.05.07 15:36  
잘 보고 갑니다 나죠님 ~~
소원은 2009.07.20 23:03  
어렵고 살앗던 북한생활들을 잊지말고 여기 한국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꼭 부자되세요^^그리고 북한에서 맘껏 누려보지 못햇던 행복과 희망을 예쁜 딸 에게 모두 안겨 주세요~~나죠님 홧팅 ! !!!우린 엄마니까나요 ㅎㅎ.....
프로펠라 2009.10.19 22:02  
나죠님 글 잘읽었습니다 그땅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진실을 알수 잇네요 ㅠㅠ 읽는중 언니가 돈주라고 하는 대사에서 눈물이 주루루루 흘러나오네요 내가 바보 됫는가봐요 ㅠㅠ
주은향 2010.01.17 19:38  
내일같군요 함흥 흥남같군요 비료훔치던 정신이면 잘할수 있을거예요 힘내세요
나죠 2010.01.29 11:23  
님두 비료공장을 아는걸 보니 흥남사람인가봐요
그 비료가 우리를 먹여살리긴 했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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