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할머니

박스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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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할머니



                                                                                                 이호원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맞춰 놓은 시계가 새벽 4시가 되자 방안을 울린다. 자전거로 새벽 아스팔트길을 서둘러 달려간다. 간간이 자동차 한, 두 대 지나가는 것이 고작인 고요한 서울 새벽 거리. 희미해져 가는 별들을 스쳐 온 새벽공기에 머릿속이 청명해지는 기분이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업장 밖에는 각 회사에서 미리 놓고 간 우유, 주스, 야쿠르트, 빵과 같은 식료품들이 쌓여 있다. 저만치에서부터 걸어오는 이곳 직원의 모습이 가로등에 어렴풋이 비취어 온다. 얼마 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왔다. 이 곳에서는 각 회사에서 원가로 받은 물품들을 편의점이나 중․소형 할인매장에서 납품하는 일을 한다. 물건을 늦지 않게 보내줘야 하므로 언제나 작업장은 새벽부터 시끄럽다. 

한쪽에서 직원이 기관총 빗발치듯 품목을 부르면, 나는 불에 달군 자갈 위에 맨발로 서 있는 노예 마냥 재빠르게 움직여 플라스틱 사각상자 안에 담는다. 한참 그렇게 물건을 담고 있는 사이 1.5톤의 짐차가 작업장 안으로 뒤꽁무니를 들이민다. 아르바이트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담아 놓은 식료품들을 실으러 화물차로 다가간다. 한 차도 아닌 네 대에 물건을 싣는 일은 벅찼다. 그것을 여기에서는 ‘상차’라고 한다.

상차가 끝나는 동시에 허리가 금세라도 끊어질 듯 욱신대고,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어 연신 꼬르륵,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그렇지만 새벽에 일어나 땀방울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지 않은가. 

일을 마친 후, 각자는 자신의 카드를 출퇴근기록기에 집어넣는다. '찌르륵'하고 돈 쌓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게다가 가끔씩 빵이 남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허기져 있던 배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11월로 접어들면서 새벽 공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당뇨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나는 누가 말을 걸어와도 그냥 성의 없이 대답하기 일쑤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예민해진 상태다.

얼마 전인가? 이곳에 어떤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일이 끝나 갈 무렵, 아침 9시경에 찾아와 밖에 내다놓은 종이 박스를 가져가는 할머니였다. 전에도 이곳에서 종이 박스를 가져가는 여러 어른들을 보았는데, 여기서는 그 종이 박스를 버리기 때문에 누가 가져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한 날 어떤 할머니가 와서 가져가면 다음날은 다른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와서 가져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할머니의 모습만 계속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일이 채 끝나지도 않기 전부터.

할머니는 문밖에서 기웃거리다 일이 끝난 것을 눈치 채고, 얼른 들어와 박스를 접기 시작한다. 게다가 우리가 해야 하는 청소도 한다. 사실 박스를 접는 것 또한 아르바이트생들의 몫이지만 한사코 자신이 하겠다는 할머니 덕분에 일이 조금이나마 일찍 끝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부터 나는 걸핏하면 새벽 5시까지 나와야 하는 출근시간을 어겼고, 툭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짜증을 냈다. 변한 것이 하나 더 있다. 할머니가 이곳을 찾아오는 시간이 몇 시간 앞당겨졌다.

오늘도 할머니는 아예 작업장 안으로 들어와서는 우리가 던지는 박스를 정리하고 있다. 직원들이 아무 말 없어 나 역시 뭐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솔직히 그 할머니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한 쪽 구석에서 박스를 접는다손 치더라도, 그곳은 빈 박스들이 사정없이 날아오는 장소이다. 나는 종이박스를 모질게 던져서라도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했으나, 할머니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조심조심 던질 수밖에 없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장 안으로 들어와 한쪽 구석 쓰레기통 옆에 쪼그려 앉아 종이박스가 날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일이 시작되고, 빈 박스들이 할머니 쪽으로 날아가면서 자연히 할머니의 박스 접기도 시작됐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박스를 접던 할머니가 갑자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이다. 쓰레기통 안으로 날아 들어간 박스를 꺼내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싶다. 할머니는 계속 날아오는 박스를 접으면서도 뭔가 미련이 있는 사람처럼 시선을 쓰레기통에서 떼지 못하고 있다.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각자의 위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할머니가 쓰레기통 안에서 꺼내 온 뭔가를 들고 나에게 다가온다. 처음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어 뭔지 몰랐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1L짜리 우유라는 것을 알았다.

"젊은이, 이 우유 내가 가져가면 안 될까요? 우리 집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먹을 게 없어서…… 이 우유 주면 참 좋겠는데……."

버리려고 했던 것을 할머니에게 줘도 별 탈은 없지만, 딱 부러진 한 마디가 내 입 밖으로 튀어 나온다. "안 되는데요." 할머니는 우유를 다시 쓰레기통속에 집어넣지 않고 있다. 나와 시선을 피한 채로.    

"쓰레기통에서 꺼냈는데, 안 돼요? 우리 개가 새끼를 낳아서 강아지 멕이려고 하는데……  강아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할머니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러한 나에게 할머니가 집요하게 물어 오는 데에 순간 짜증이 난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할머니, 전 직원이 아니라서 잘 몰라요. 그냥 박스나 가져가세요."

나는 할머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러나 할머니는 노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알았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는 도로 우유를 쓰레기통 안에 넣고, 쪼그려 앉아 말없이 박스를 접는다. 할머니가 돌아간 후,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가시질 않고 있다. 박스를 팔아 봤자 몇 푼이나 번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와 박스를 가져가는 할머니에게 너무 했다는 생각이 씁쓸함으로 되돌아온다. 기실 그 우유들은 쓰레기 소각장으로 갈 우유다.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팔 수는 없는 우유…… 할머니가 가져가 강아지에 먹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우유……

다음 날 할머니가 오면 주려고 우유를 챙겨 두었지만,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종이박스가 다른 어른들의 차지가 돼가고 있어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와 같이 리어카나 유모차에 박스를 싣고 힘겹게 끌고 다니는 할머니들이 눈에 뜨인다. 그들을 모습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그 할머니의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그려지는가. 

다행히 병원에서는 어머니의 병이 많이 호전됐다고 한다. 나는 평상시처럼 웃음을 되찾았으나 한편으로는 우울한 기분이 내 몸 곳곳을 휘감아 돌고 있다. 

날이 갈수록 겨울 바람이 매서워지고 있다. 곧 명절이 다가온다 해서 작업장 안에는 온갖 과일박스와 선물세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종이박스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없이 떨어진다. 그날따라 바람은 아침부터 거칠게 불어 닥치고 있었다. 그런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일이 한창 진행되어 갈 무렵이었다. 밖에서 누군가 천천히 문을 열더니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는 멀끔히 웃는 것이다. 할머니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반색이 가득한 얼굴로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할머니도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작업장내로 들어온다. 박스를 접기 시작한다. 몸 어디가 불편한지 할머니에게서 "콜록콜록" 하는 기침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조심조심 할머니에게 박스를 건네준다. 받을 때마다 할머니는 생긋 하고 웃는다. 일이 거의 끝나 갈 즈음 할머니의 박스 접는 일이 끝이 났다. 마무리 정리만 하면 되는데, 예전에는 자신의 이일 끝나는 대로 돌아갔던 할머니가 오늘은 뭔가 아쉬움이 남았는지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할머니, 뭐 가져갈 거라도 있으세요? 박스 이젠 없어요."

"아니, 그냥 일하는 것 좀 보고 싶어서…… 고마워요, 젊은 총각."

"뭘요. 오히려 저희가 고맙죠."

거친 숨소리를 몰아쉬면서도 애써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보인다. 그런데, 할머니의 시선이 작업장에 남아 있는 빵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더니, 빵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또 다시 나를 보더니 멋쩍은 듯 웃는다. 나도 그런데 이 때쯤이면 할머니 역시 출출할 것이다. 나는 빵 있는 곳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앙금이 들어간 빵 하나를 집으려고 하는데, 직원 한 명이 재고조사를 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나는 빵을 얼른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한참을 있어도 직원이 사무실로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할머니는 그 자리에 계속 있기가 머쓱한지 이내 밖으로 나간다. 리어카에 박스를 싣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할머니를 따라 나간다.

"할머니, 혼자 사세요?"

할머니는 나를 한 참을 쳐다보더니 예, 라는 말과 함께 밭은기침을 내뱉는다. 할머니의 안색이 잠시 차갑게 변하고 있다. 눈 주변 색이 짙다. 할머니가 리어카 손잡이를 붙잡고 일어선다. 호흡을 크게 한번 내쉰다. 입김 때문인가, 벌써부터 할머니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 하고 맺히는 것 같다. 이를 앙 물고 한 발을 크게 내딛는다. 할머니의 표정이 일시에 구겨진다. 할머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또 다시 밝게 웃는다. 

"고마워요, 젊은이. 콜록."

묵직해 보이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할머니는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나는 멀어져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본다. 입김 때문인가,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졌다. 입김이 시야에서 걷힌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게시물에 달린 코멘트 5
나파아란하늘 2014.01.11 14:34  
가슴 아파요 직원이 미워요 잘보고 갑니다
2014.01.12 10:00  
이런일은하루하면 힘들고 3일을 지나면 그때부터는 힘들지가 않아요. 힘들더라도 운동한다고하면 즐거워요..
큼이 2014.01.12 14:53  
닉네임 마음에 드는데요,,,,,,,,,,,,,,,,, ㅎㅎ,,,,,,,,,,,,,,,,,
퐁주 2014.03.04 20:56  
잘 읽었어요~~
남남북녀1 2015.07.23 00:35  
좋은글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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