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있는 나의 친구 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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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2 22:14
나에게는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함께 자란 친구가 있었다.
다른 애들 자랄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정희는 어릴적부터 싸우기도 잘하고 인차 화해하고 다시 친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애한테는 말하기 힘든 특이한 면이 있었다 .
말하기도 싫어하고 성질도 괴이한 애였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얘기를 나한데 잘한다.
이따 자라서 크면 누구하고 결혼할것이라는 등등 여자애들이 하는 그런 소곤소곤 얘기를 다 나한데 하군했었다.
그 애를 말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 애는 이상하게도 수자 7과 인연이 있었다.
생일도 7월17일 이고 사는 집도 4층 17호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출석부 번호도 27이였다.
너무도 이상할 정도라고 할 일이다 .
그래서 그 애는 농담으로 자기는 앞으로 죽어도 7자와 연결되는 날에 죽을거라고 했다.
어릴적부터 그 애와 나는 아래웃집에서 살았다 .
그래서 학교도 같이 가고 집에도 같이 오고 그랬다.
인민학교 시절은 그래도 그럭저럭 별 일없이 지났는데 고중에 올라오면서 나라가 어려워지다보니 집집마다 사정도 어려워진다.
우리도 그렇지만 정희네 집도 알짜 로동자라 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희네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교구로 이사를 갔다 .
그러나 학교가 멀다고 전학하라는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그냥 원래 다니던 학교친구들을 떠날수 없다고 먼길을 통학하곤 했다.
정희가 이사 간 집 근처에도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정희가 갓 이사 갔을 때 나는 그것이 이해가 안되였다.
왜서 그 멀고 먼 학교를 다니느라 고생하는 그애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학교나 다 마찬가지로 시험칠 때는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올리느라고 밤 자습을 시켰다. 선생님들도 다 자기학급 실력이 다른반에 비해 높기를 바래서였다.
평상시 농촌 지원으로 봄이면 한 4~5십일씩 공부도 못하고 또 가을이면 6~7십일씩 학습을 밀리고 나면 사실이지 시험 치르기가 바쁘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시험이 임박한 때면 밤 자습으로라도 밀린 우리의 성적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면 밤늦게 집에 가자면 집이 학교와 먼 애들이 고생이다.
일반적으로 집이 멀어도 그냥 다 혼자 가야 했다.
그런데 정희는 야맹증이 있었다.
나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정말 그런 병이 있단다.
평상시 낮에는 다 잘 보이는데 밤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반간부인 나와 남자 반간부 두명을 더 붙여주어 그 애를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셨다.
지금 말하긴 좀 멋적지만 그 때 나는 그 애가 미웠다.
밤자습 끝나면 내 자신도 퍽 늦었는데 또 그 애를 그 먼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하니 그게싫었다. 남자 반간부애들은 다 나와 한 아빠트에 살기에 선생님은 내가 좀 늦게 집에 가도 마음 놓여서 그러셨는데 나는 그게 어쩐지 싫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갈때 반 남자애들이 그 애를 부축하고 나는 앞에서 그들의 길잡이하면서 집까지 갔었다. 그 때면 나는 그 애의 눈을 볼수 있었다. 밤이면 안 보이는 그 애눈이 넘 믿기지 않아서 그때 본 그 눈빛이 선하다.
하기 싫은걸 하는 애들의 태도나 내 말투에서 못마땅해하는 느낌을 받아 미안해하던 그 눈빛 ,,, 지금 생각하면 넘 미안하고 그토록 못되게 대한 내가 좀 얇밉다.
그래도 그 애는 나한데 참 잘해줬다.
시험 기간이면 밤마다 집 데려다 주는 나한데 미안해서인지.....
그런 그 애는 남다른 점이 많았다.
가끔 남이 알아도 못 들을 말도 잘했고 이상한 짓도 잘했다.
한번은 국어선생님이 강의하는데 선생님보고 집에 일이 생겼다고 빨리 가보라고 이상한 소리도 해서 욕도 먹고 했는데 후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나한테 얘기하는것이 그날 국어 선생님네 집에 정말로 불이 났댔단다.
그래도 국어선생님은 그게 이해가 안 갔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가봐 담임선생님한데만 말했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가 정희와 친하니 나에게 물었다.
드문드문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던가고....
난 그런 일 없었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얼마후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가 외가집에 이모 잔치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학교 다니기에 못 따라가고 동생과 집에 남게 되였다.
그 때 나는 동생하고 단 둘이 집에 있는게 무서워서 정희하고 우리집에서 같이 잤다.
그런데 열흘이면 돌아온다고 약속한 부모님이 보름이 걸려도 안 돌아 오셨다.
그 원인은 우리 부모님이 여행 떠나 얼마 안돼 조선에서 준전시 상태가 내려져서 모든 철로가 다 끊기고 전쟁 준비로 바쁠 때여서였다.
그래서 나와 동생 그리고 정희도 학교에서 조직하는 전쟁 준비로 학교에서 자고 그랬다.
자다가 방습 경고가 울리면 배낭 메고 안전 대피하던 생각도 난다 .
쌀 주머니에 집에 있는 쌀 모두를 동생과 내것 두 몫으로 나눠 담고 비상함을 챙겨 메고 뛰던 일이....
그 때 나는 정말 무서웠다.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엄마 하고 아버지하고 영영 헤여질까 두려워서였다. 그 때마다 정희는 이불속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괜찮다고 달래주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뒤좌석에 앉은 정희가 가만히 쪽지를 보내왔다.
"오늘 저녁 너네 엄마가 올거야 " 그래서 내가 니가 어떻게 아냐 했더니 자기는 안단다.
그런데 공부 끝나고 집에 가보니 정말 엄마와 아버지가 집에 와 계셨다.
잔치 끝나고 외할머니가 잔치 보러 못 온 외손자,손녀한데 챙겨준 맛있는 음식들을 한가득 가지고... 그래서 내가 가방에 정희 주려고 잔치 음식도 챙겨 넣던 일도 생각 난다.
그렇게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게 되였다.
나는 시에서 뽑는 **부대 군인으로 선발되였다. 여자들이 **군대 가는것도 다 뇌물이 들어가야 하기에 나는 군대 신체검사에서도 합격되였지만 결국엔 탈락되였다.
우리 시에서 네명만 뽑는 그런 부대인지라 엄마는 내가 거기에 못간것을 대단히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재산을 팔아서라도 좀 뇌물을 고이는건데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못 간것도 잘된것 같다ㅎㅎㅎ
그 때 정희는 사회의 어느공장에 들어갔다. 우리 반애들도 여럿이 그 공장으로 갔다.
그러다보니 사회 생활하느라고 바쁘서 그 애와는 소식도 없이 일년 넘어 지났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시장에서 낡은 가구 파는 곳에서 정희 엄마를 보았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정희가 큰 병에 걸려서 공장도 못 나간단다.
몇일후 나는 같은 공장 다니는 동창생들한테서 그 말을 듣고서야 놀랐다.
그래서 정희와 친한 애들 셋이서 꽈배기 세개 사들고 정희네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구들에 누워 있는 정희는 너무 부어오른 배에 가리워져 얼굴마저 안 보였다. 그런 정희를 보고 놀랐다. 정희 엄마한테 물으니 영양실조에 간복수까지 왔다고 한다.
하얀 피부가 이젠 누렇게 떠가고 손은 너무 약해서 가느다란 뼈 밖에 안 남은 정희를 보면서 눈물부터 났다.
그래도 우리를 알아보고 입가에도 웃음은 지어 보였다.
배가 너무도 아프게 부어서 가죽이 반질반질했다.
다치면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았다. 죽밖에 못 먹는단다 .
그래도 정희엄마가 어디서 돈 좀 구해오면 드문드문 링겔을 맞아서 집 구석에 링겔 맞다가 남은 맥주병들을 볼수 있었다. 이전에 보이던 남들의 집에 없던 그 일본제 록음기와 텔레비죤은 안보였다. 남은거란건 이젠 넘 낡아서 들지도 못할 낡은 가구밖에....
그러면서 정희와 우리는 얘기도 좀 나누고 웃기도 했다. 우리가 집 나설때 정희는 울었다.
나는 그때 그가 죽음을 앞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 후에 정희 엄마가 사람을 띄워 공장에서 일하는 나한데 기별이 왔다.
정희가 나를 자꾸 찿는다고 시간이 있으면 한번 좀 와 보란다.
그래서 정희를 보러 다시 그 애 집에 갔을 때는 이전보다 더 낡은 단칸집이였다.
아마 병든 환자를 시중하다보면 생기게 되는 그런 일이다.
정희는 이젠 말도 못하는 그런 정황이였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고 입가에 웃음도 지어 보였다.
아무말도 할수 없는 그 애 눈빛이 살 기를 갈망하는 아직 피여보지도 못하고 피다가 지는 그런 한송이 꽃처럼 처량해 보이고 불쌍해 보였다.
아무것도 도와줄수도 없고 아무말도 해줄수도 없는게 원통했다.
쌕쌕하면서 쉬는 정희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 때에야 그 애가 죽음을 앞에 두었음을 느꼈다. 앞에 앉아서 울다가 손이나 만져보고 그러는데 나는 문뜩 정희와 나만이 아는 그 비밀이 생각났다. 정희가 나한데 농담 삼아 이따가 크면 결혼하고 싶다고 한 우리반 남자애가 생각났다. 누구나 17~18세 사춘기 시절 제일 친한 여자친구끼리 단둘이 나누는 첫사랑 얘기 ,지금 생각하면 연애도 못한 그 첫사랑 얘기가 남한데 알려질까봐 둘이서 소곤대면서 좋아라 웃던 정희가 생각났다 .
그렇게 정희와 헤여져서 6일만에 , 1월17일 정희가 세상을 떠나갔다 .
그러고 보면 정말로 정희는 7과 그 무슨 인연이 있을꺼라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농담으로 자기는 19세까지 살수 있다고 이상한 소리도 했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정말로 만18세를 넘기고 세상을 떠나갔다.
그렇게 많고 많은 신비함만 남겼던 그 애 일이 그냥 이상하기만 했었는데 중국에 와서 하느님이 있다고 이곳저곳에서 얘기할 때면 아마 그 애도 지금은 하느님이 사는 그 천국에 있을꺼라고 생각한다. 좀 허무한 생각같지만 정말그렇다고 믿고 싶다.
나만이 아는 정희의 첫사랑인 그 남자애도 졸업후 군대로 나갔는데 영양실조로 군대간지 2년만에 집에도 못 오고 부대에서 죽었다고 연락이 와서 그애 부모들도 얼굴도 못보고 훈장만 받아가지고 왔다.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천국에 있는 정희가 쓸쓸해 할까봐 군대에서도 건설부대라 힘들게 고생하는 그 남자애를 천국에서 함께 있게 한거라고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남자애는 아마도 정희와 옆집에 살면서도 정희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 했는지도 몰랐다. 그 애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남모르게 웃으면서 나한데 눈빛을 주던 정희가 천국에서는 아마도 그 애한데 고백을 했을까?
아마 고백은 못해도 서로 보기만 한거로도 정희는 기뻐할것이다. 그럴거라 믿는다.
(제가 갑자기 생각나는 친구에 대해 쓴 실없는 글도 마지막까지 보아주신 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시고 나서 드는 견해를 댓글로 달아주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애들 자랄 때와 마찬가지로 나와 정희는 어릴적부터 싸우기도 잘하고 인차 화해하고 다시 친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애한테는 말하기 힘든 특이한 면이 있었다 .
말하기도 싫어하고 성질도 괴이한 애였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모든 얘기를 나한데 잘한다.
이따 자라서 크면 누구하고 결혼할것이라는 등등 여자애들이 하는 그런 소곤소곤 얘기를 다 나한데 하군했었다.
그 애를 말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 애는 이상하게도 수자 7과 인연이 있었다.
생일도 7월17일 이고 사는 집도 4층 17호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출석부 번호도 27이였다.
너무도 이상할 정도라고 할 일이다 .
그래서 그 애는 농담으로 자기는 앞으로 죽어도 7자와 연결되는 날에 죽을거라고 했다.
어릴적부터 그 애와 나는 아래웃집에서 살았다 .
그래서 학교도 같이 가고 집에도 같이 오고 그랬다.
인민학교 시절은 그래도 그럭저럭 별 일없이 지났는데 고중에 올라오면서 나라가 어려워지다보니 집집마다 사정도 어려워진다.
우리도 그렇지만 정희네 집도 알짜 로동자라 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희네도 시내에서 좀 떨어진 교구로 이사를 갔다 .
그러나 학교가 멀다고 전학하라는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그냥 원래 다니던 학교친구들을 떠날수 없다고 먼길을 통학하곤 했다.
정희가 이사 간 집 근처에도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정희가 갓 이사 갔을 때 나는 그것이 이해가 안되였다.
왜서 그 멀고 먼 학교를 다니느라 고생하는 그애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어느 학교나 다 마찬가지로 시험칠 때는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올리느라고 밤 자습을 시켰다. 선생님들도 다 자기학급 실력이 다른반에 비해 높기를 바래서였다.
평상시 농촌 지원으로 봄이면 한 4~5십일씩 공부도 못하고 또 가을이면 6~7십일씩 학습을 밀리고 나면 사실이지 시험 치르기가 바쁘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시험이 임박한 때면 밤 자습으로라도 밀린 우리의 성적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면 밤늦게 집에 가자면 집이 학교와 먼 애들이 고생이다.
일반적으로 집이 멀어도 그냥 다 혼자 가야 했다.
그런데 정희는 야맹증이 있었다.
나도 그때는 잘 몰랐는데 정말 그런 병이 있단다.
평상시 낮에는 다 잘 보이는데 밤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반간부인 나와 남자 반간부 두명을 더 붙여주어 그 애를 집까지 데려다 주라고 하셨다.
지금 말하긴 좀 멋적지만 그 때 나는 그 애가 미웠다.
밤자습 끝나면 내 자신도 퍽 늦었는데 또 그 애를 그 먼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하니 그게싫었다. 남자 반간부애들은 다 나와 한 아빠트에 살기에 선생님은 내가 좀 늦게 집에 가도 마음 놓여서 그러셨는데 나는 그게 어쩐지 싫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갈때 반 남자애들이 그 애를 부축하고 나는 앞에서 그들의 길잡이하면서 집까지 갔었다. 그 때면 나는 그 애의 눈을 볼수 있었다. 밤이면 안 보이는 그 애눈이 넘 믿기지 않아서 그때 본 그 눈빛이 선하다.
하기 싫은걸 하는 애들의 태도나 내 말투에서 못마땅해하는 느낌을 받아 미안해하던 그 눈빛 ,,, 지금 생각하면 넘 미안하고 그토록 못되게 대한 내가 좀 얇밉다.
그래도 그 애는 나한데 참 잘해줬다.
시험 기간이면 밤마다 집 데려다 주는 나한데 미안해서인지.....
그런 그 애는 남다른 점이 많았다.
가끔 남이 알아도 못 들을 말도 잘했고 이상한 짓도 잘했다.
한번은 국어선생님이 강의하는데 선생님보고 집에 일이 생겼다고 빨리 가보라고 이상한 소리도 해서 욕도 먹고 했는데 후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나한테 얘기하는것이 그날 국어 선생님네 집에 정말로 불이 났댔단다.
그래도 국어선생님은 그게 이해가 안 갔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가봐 담임선생님한데만 말했단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가 정희와 친하니 나에게 물었다.
드문드문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던가고....
난 그런 일 없었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얼마후 우리 엄마하고 아버지가 외가집에 이모 잔치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나는 학교 다니기에 못 따라가고 동생과 집에 남게 되였다.
그 때 나는 동생하고 단 둘이 집에 있는게 무서워서 정희하고 우리집에서 같이 잤다.
그런데 열흘이면 돌아온다고 약속한 부모님이 보름이 걸려도 안 돌아 오셨다.
그 원인은 우리 부모님이 여행 떠나 얼마 안돼 조선에서 준전시 상태가 내려져서 모든 철로가 다 끊기고 전쟁 준비로 바쁠 때여서였다.
그래서 나와 동생 그리고 정희도 학교에서 조직하는 전쟁 준비로 학교에서 자고 그랬다.
자다가 방습 경고가 울리면 배낭 메고 안전 대피하던 생각도 난다 .
쌀 주머니에 집에 있는 쌀 모두를 동생과 내것 두 몫으로 나눠 담고 비상함을 챙겨 메고 뛰던 일이....
그 때 나는 정말 무서웠다. 이러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엄마 하고 아버지하고 영영 헤여질까 두려워서였다. 그 때마다 정희는 이불속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괜찮다고 달래주군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뒤좌석에 앉은 정희가 가만히 쪽지를 보내왔다.
"오늘 저녁 너네 엄마가 올거야 " 그래서 내가 니가 어떻게 아냐 했더니 자기는 안단다.
그런데 공부 끝나고 집에 가보니 정말 엄마와 아버지가 집에 와 계셨다.
잔치 끝나고 외할머니가 잔치 보러 못 온 외손자,손녀한데 챙겨준 맛있는 음식들을 한가득 가지고... 그래서 내가 가방에 정희 주려고 잔치 음식도 챙겨 넣던 일도 생각 난다.
그렇게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게 되였다.
나는 시에서 뽑는 **부대 군인으로 선발되였다. 여자들이 **군대 가는것도 다 뇌물이 들어가야 하기에 나는 군대 신체검사에서도 합격되였지만 결국엔 탈락되였다.
우리 시에서 네명만 뽑는 그런 부대인지라 엄마는 내가 거기에 못간것을 대단히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재산을 팔아서라도 좀 뇌물을 고이는건데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못 간것도 잘된것 같다ㅎㅎㅎ
그 때 정희는 사회의 어느공장에 들어갔다. 우리 반애들도 여럿이 그 공장으로 갔다.
그러다보니 사회 생활하느라고 바쁘서 그 애와는 소식도 없이 일년 넘어 지났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시장에서 낡은 가구 파는 곳에서 정희 엄마를 보았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정희가 큰 병에 걸려서 공장도 못 나간단다.
몇일후 나는 같은 공장 다니는 동창생들한테서 그 말을 듣고서야 놀랐다.
그래서 정희와 친한 애들 셋이서 꽈배기 세개 사들고 정희네 집을 찾아갔다.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구들에 누워 있는 정희는 너무 부어오른 배에 가리워져 얼굴마저 안 보였다. 그런 정희를 보고 놀랐다. 정희 엄마한테 물으니 영양실조에 간복수까지 왔다고 한다.
하얀 피부가 이젠 누렇게 떠가고 손은 너무 약해서 가느다란 뼈 밖에 안 남은 정희를 보면서 눈물부터 났다.
그래도 우리를 알아보고 입가에도 웃음은 지어 보였다.
배가 너무도 아프게 부어서 가죽이 반질반질했다.
다치면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았다. 죽밖에 못 먹는단다 .
그래도 정희엄마가 어디서 돈 좀 구해오면 드문드문 링겔을 맞아서 집 구석에 링겔 맞다가 남은 맥주병들을 볼수 있었다. 이전에 보이던 남들의 집에 없던 그 일본제 록음기와 텔레비죤은 안보였다. 남은거란건 이젠 넘 낡아서 들지도 못할 낡은 가구밖에....
그러면서 정희와 우리는 얘기도 좀 나누고 웃기도 했다. 우리가 집 나설때 정희는 울었다.
나는 그때 그가 죽음을 앞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 후에 정희 엄마가 사람을 띄워 공장에서 일하는 나한데 기별이 왔다.
정희가 나를 자꾸 찿는다고 시간이 있으면 한번 좀 와 보란다.
그래서 정희를 보러 다시 그 애 집에 갔을 때는 이전보다 더 낡은 단칸집이였다.
아마 병든 환자를 시중하다보면 생기게 되는 그런 일이다.
정희는 이젠 말도 못하는 그런 정황이였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고 입가에 웃음도 지어 보였다.
아무말도 할수 없는 그 애 눈빛이 살 기를 갈망하는 아직 피여보지도 못하고 피다가 지는 그런 한송이 꽃처럼 처량해 보이고 불쌍해 보였다.
아무것도 도와줄수도 없고 아무말도 해줄수도 없는게 원통했다.
쌕쌕하면서 쉬는 정희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그 때에야 그 애가 죽음을 앞에 두었음을 느꼈다. 앞에 앉아서 울다가 손이나 만져보고 그러는데 나는 문뜩 정희와 나만이 아는 그 비밀이 생각났다. 정희가 나한데 농담 삼아 이따가 크면 결혼하고 싶다고 한 우리반 남자애가 생각났다. 누구나 17~18세 사춘기 시절 제일 친한 여자친구끼리 단둘이 나누는 첫사랑 얘기 ,지금 생각하면 연애도 못한 그 첫사랑 얘기가 남한데 알려질까봐 둘이서 소곤대면서 좋아라 웃던 정희가 생각났다 .
그렇게 정희와 헤여져서 6일만에 , 1월17일 정희가 세상을 떠나갔다 .
그러고 보면 정말로 정희는 7과 그 무슨 인연이 있을꺼라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농담으로 자기는 19세까지 살수 있다고 이상한 소리도 했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정말로 만18세를 넘기고 세상을 떠나갔다.
그렇게 많고 많은 신비함만 남겼던 그 애 일이 그냥 이상하기만 했었는데 중국에 와서 하느님이 있다고 이곳저곳에서 얘기할 때면 아마 그 애도 지금은 하느님이 사는 그 천국에 있을꺼라고 생각한다. 좀 허무한 생각같지만 정말그렇다고 믿고 싶다.
나만이 아는 정희의 첫사랑인 그 남자애도 졸업후 군대로 나갔는데 영양실조로 군대간지 2년만에 집에도 못 오고 부대에서 죽었다고 연락이 와서 그애 부모들도 얼굴도 못보고 훈장만 받아가지고 왔다.
그 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천국에 있는 정희가 쓸쓸해 할까봐 군대에서도 건설부대라 힘들게 고생하는 그 남자애를 천국에서 함께 있게 한거라고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남자애는 아마도 정희와 옆집에 살면서도 정희가 자기를 얼마나 좋아 했는지도 몰랐다. 그 애를 보기만 해도 좋아서 남모르게 웃으면서 나한데 눈빛을 주던 정희가 천국에서는 아마도 그 애한데 고백을 했을까?
아마 고백은 못해도 서로 보기만 한거로도 정희는 기뻐할것이다. 그럴거라 믿는다.
(제가 갑자기 생각나는 친구에 대해 쓴 실없는 글도 마지막까지 보아주신 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시고 나서 드는 견해를 댓글로 달아주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