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 2부 이룰 수 없는 꿈 > 북한에서 있은일

본문 바로가기

북한에서 있은일

나의 꿈 - 2부 이룰 수 없는 꿈

본문

2

이를 수 없는 꿈

그러나 예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은 아빠 엄마가 무지 고지식한 분들이시다보니 너무나도 가난했다.

그리하여 해마다 꼭 한번 쓴 고배를 넘겨야 하는 때가 있었는데 설맞이 공연을 할 때였다.

한번은 우리라는 노래로 여성 2중창을 하게 되었는데 노래하는 학생들은 첫날 옷감으로 된 하들 하들 한 천으로 만든 공연복을 입게 되어 있었고 뒤에서 반주하는 친구들은 하얀색 하의에 반짝거리는 소재로 된 적색 상의를 입게 되어 있었다.

학부형들이 각자 돈을 내면 그것으로 천을 사서 해입히기로 했는데 역시 우리 집은 가난하다보니 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 학교 미술선생님에게 부탁하여 하얀 색상에 빤짝거리는 점박이가 붙어 있는 원피스를 빌려 입었는데 어른 치마다 보니 엄청 길었다.

남의 옷이라 기워입을 수도 없고 해서 허리쪽이 고무 단이라 살짝 접어 넣었다.

공연은 아침 한번 저녁 한번 해서 총 일주일 했던 것 같다.

어느날 공연하는데 반주가 나오면 내가 먼저 나가야 하는데 반박자가 늦어지자 뒤에 있던 친구가 내 치마를 살짝 당겨놓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갔는데 무대 아래서 지휘를 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눈이 심상치 않으셨다.

그날 공연 끝나고 얼마나 혼이 났던지,,,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우리 학교선생님들이 나를 엄청 챙겨주셨고, 반 친구들은 모두 부러움 반 질투 반으로 나를 대했다.


학교 때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다행이도 공부를 좀 하다보니 잘 사는 내 친구 공부 배워주고 그 집에서 밥을 얻어 먹 곤 했다.


우리 랑은 조금 먼 친척이었는데 천연색텔레비죤에 냉장고며 선풍기 당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 집에서는 쉽게 접해볼 수 없던 가전제품들이 있었고 집에 전화기도 설치되어 있었다. 걔네 아빠가 우리 도에서 좀 유명한 공장 초급당비서였는데 우리 구역에서 걔네 아빠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살았다. 그 집에서 무슨 대사를 하면 간부 차들이 그 집 올라가는 꽤 긴 골목길을 꽉 메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공부를 배워준다는 핑계로 자주 그 친구 집에 찾아갔다. 그래서는 공부를 다 배워주고 나면 집으로 가야 하는데 집에 가봐야 멀건 죽이 기다리고 있을 생각에 집이 멀다는 핑계 대고 집에는 안가고 무작정 눌러앉아 버리곤 했다. 그래서인지 걔네 엄마 나를 엄청 천대했었다. 그래도 버틸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배고픔에 체면이고 뭐고 없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공부는 못했지만 잘난 아빠를 둔 덕에 우리 학급에서 6년간을 쭉 분단위원장을 했었다. 그렇게 밉상이어도 그 집에서 저를 내쫓을 수 없었던 건 먼 친척도 친척이지만 시험 때마다 제가 거의 그 친구 시험지를 대신 써주고 또 보고서며 계획서며 온갖 소년단 사로청서류는 제가 다 작성을 해줬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그 친구의 이쁜 마음씨 덕분이기도 했다.


한번은 그 친구 집에서 공부를 배워주고 그 날도 집에 가기 싫어 그 집에서 자는데 밤 늦게 집에 온 걔네 아빠가 낙지를 뜯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다. 아 그 먹고 싶은 낙지 냄새가 제 창자를 휘집는데 잠이 올 리가 있나. 눈만 감고 누워있는데 걔네 아빠가 자기 집 식구들만 깨워서 낙지를 먹이는 것이다. 아 그때 그 설음이란...



암튼 이런 시절을 거쳐 학교를 졸업하던 해 일이 안 될라니 저를 가수로 키우시겠다고 장담하시던 소년회관 선생님이 코레라라는 전염병에 걸리시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때 평양행사에 발탁되어 우리 구역 대표로 평양행사에 참가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노래를 잘 불러 도 시, 구역 사로청 간부들의 관심을 한가득 받은 적이 있었던 저는 6학년 졸업반이 되어오자 도사로청 추천으로 평양 청년협주단이라는데를 올라갔다가 거기 간부들이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뇌물 마련할 돈이 없어 처참하게 집으로 내려오는 참극을 맞이 했다.

슬럼프도 그런 슬럼프가 어디 있을까. 완전 90도 하강선을 그은 것이다.



그렇게 가수가 되고 싶었던 저의 꿈은 송두리째 뽑혀 멀리 저멀리 훨훨 나를 떠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때 내 문건이 떠다니다 보니 다른 친구들이 일자리를 배치 받을 때 나는 무배치로 붕 떠있게 되었다.


꿈이 진 다음에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몇 년동안 동생들이랑 함께 비료배낭이며 소금배낭을 메고 먼 산골로 농촌으로 식량 구하러 다녔고, 나중에는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있다가 탈북을 하게 되었다.

북한을 탈출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기전에 옥수수밥이라도 실컷 먹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시던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입을 옷이 없어 다 찢어지고 헌 운동복 한 벌을 입혀보내드렸다.

아버님 돌아가신지 100일 되던 날 나는 아시는 분에게서 빌린 돈 1400원중에서 200원으로 아버님 제사상을 차리고 아버님께 우리 가족 좀 살려달라고 열심히 열심히 빌었다.


탈북을 한 동기도 국경쪽에 가서 장사거리나 좀 알아볼까 하고 갔다가 중국에 가서 한달만 일하면 1년치 식량을 살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브로크부부의 속임수에 순수함이 도를 넘는 그 시기 가족을 위해 선뜻 응했다.

중국가면 처녀들을 데려다 내장을 뽑아간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판에 뭐 운명에 맏겨보자 라고 떠난 것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1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1

산새님의 댓글

profile_image
아픈 사연이네요  이 글 쓴 시기는 2016년, 5년전이네요.  현재는 잘 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고향과 가족의 그리움은 언제나 마음에 꽉차서 늘 무겁게 누르고 있겠지만요.
그래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전체 234 건 - 1 페이지
번호
제목
글쓴이
게시판 전체검색
상담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