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행복했던 나날들-3
2014-07-3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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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올라 짐을 선반에 올리고 앉아서 선생님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창문식탁에 잠을 청하는데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와 함께 오락회가 시작되었다.
열차에는 한 개 방통에 한 개 도의 학생들이 탔다. 웅성웅성 떠들어대는 소리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다. 그들이 잠이 올리가 있는가?이제 밤이 지나고아침이 되면 평양역에 도착하여 대회에 참석할텐데...
대회 참가자들 모두 흥분되는 가슴을 억누를길 없어 오락회를 벌인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고 의자가 뒤로 젖혀지는 버스를 타봤다. 모두 신기하여 의자를 움직여보기도 하고 불도 켜보고 바람도 맞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평양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각 도별로 열을 맞춰 줄을 세우는데 그 틈에도 대회 주석단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인민문화궁전앞에서 기다리는 배우 오미란을 봤다.
친구들이 신기해서 같이 쳐다본다. 와~ 이쁘다. 모두 저저마다 한 마디씩이다.
드디어 인민문화궁전안으로 들어간다. 내 자리는 아마 앞에서 부터 8번째 줄에 거의 가운데 쪽이 되었다. 양쪽에는 남자애들만 쭉 앉아 있었다. 자리를 바꾸자고 하니 안된단다.
함경도 학생들이 사고를 제일 많이 쳤던것 같다. 대회가 시작된 이날 인민문화궁전 대유리가 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휴식시간행사장 밖으로 나갔다가 회의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한 학생이 통유리문을 인식 못하고 그냥 달리다가 박살냈다.
그 외에도 사건사고가 많았다. ㅎㅎ
소년단대회는 3일에 거쳐 진행되었던 것 같다. 대회에서 주석단대표자들인 오은별(북한에서 유명한 꼬마화가) 김일신(현 임수경의원이랑 같이 백두한라 대행진에 참가하여 자작시를 읊어 소문났던 꼬마시인) 오미란( 이름난 영화배우, 한국 소위 말하는 여자스타배우) 또 불붙는 소년단실의 김일성초상화를 품고 화상당한채로 창문밖을 뛰어내려 사망한 한 소년단원의 어머니... 등등 북한의 소위 이름있는 영웅들과 인기인들이 참석했다.
그 친구 그 담부터 그 남자애랑 그 남자애친구들한테서 선물을 많이 받아가지고 와서는 내앞에서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그래도 난 못본척 못들은척 ㅎㅎ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지만
회의가 끝나서는 대표증 수여식과 선물증정(대학생가방. 만년필, 3색원주필. 김일성교시록, 김정일 말씀록 등등)이 있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평양시내 구경을 했다. 김정숙(김정일엄마)가 뭍혀있는 혁명열사릉부터 시작해서 옥류관, 만경대유회장, 창광원, 인민대학습당, 창광거리,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소년백화원, 만경대고향집(김일성의 고향), 등등 북한의 이름난 곳은 다 돌아본것 같다.
지금도 혁명열사릉 올라가는 계단이 어찌나 높던지 모학교 책임지도원 선생님이랑 거기 올라가지 않고 계단 밑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던 생각이 난다. 또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돌아보며 금성1고등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관람도 하고 ...
가장 기억에 남는것이 "청춘관"이라는데서 밥먹을 때다.
나는 청춘관에서 처음으로 남자도 화장을 하면 이쁘다는걸 목격했다. 청춘관은 중국식 레스토랑인데 요리사들이랑 접대원들 모두가 남자였다.
그때 그 식당에서 먹은 중국빵이랑 음료수는 입에 맞지 않아 그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것 같다.
밥다먹고 나서 주방쪽에 물 좀 얻어 먹을가 들여다 보니 거기에도 총각들이 이쁘게 화장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저를 보더니 "아이고 곱게 생겼네,어서 들어와" 하며 반겨줬던 기억이 난다.
만경대 유희장에 갔을때는 친구들이랑 유희기구 타는데 어떤 친구가 한참 돌아가는 기구안에서 "세워주세요"하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다같이 깔깔 웃어대던 기억도 난다.
또 러시아 사람들이 물보트를 타는걸 보면서 학교에서 조금 배웠다고 "따바리쉬, 따바리쉬"(동무, 동무) 라고 웨쳤던 기억도 나고 한참 대열을 맞춰 행사장을 향하는데 어떤 백인여자가 원피스를 입고 어린애손을 잡고 지나가는걸 보고 "어머 저 여자봐라. 스프링(넌닝)입구 거리를 활보하네. 부끄럽지두 않나?" 하며자꾸 돌아보군했던기억이 난다.
대회일정은 총 일주일이었다.
열차에는 한 개 방통에 한 개 도의 학생들이 탔다. 웅성웅성 떠들어대는 소리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다. 그들이 잠이 올리가 있는가?이제 밤이 지나고아침이 되면 평양역에 도착하여 대회에 참석할텐데...
대회 참가자들 모두 흥분되는 가슴을 억누를길 없어 오락회를 벌인 것이다.
어느덧 어느 구역의 남학생동무가 나를 지목했다. 나는 노래라면 자신이 넘쳐있는지라 조금 내숭을 떠는 척하다가 전혜영이가 불렀던 "사진"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순간 차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얼마나 떨리고 또 설레던지...
순간 차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얼마나 떨리고 또 설레던지...
학교 음악소조에서 연마했던 노래실력에 차안의 모든 사람이 한순간에 팬이되어버렸다.
그날 노래 총 3곡조를 뽑았던것 같다.
여기저기서 어느학교 다니냐? 노래 참 잘한다는 등등. 그날 암튼 도 사로청, 시사로청, 구역사로청까지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던것 같다. 끼라는게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었다.
여기저기서 어느학교 다니냐? 노래 참 잘한다는 등등. 그날 암튼 도 사로청, 시사로청, 구역사로청까지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던것 같다. 끼라는게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그때 절실하게 느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6시반경 우리가 탄 열차가 평양역에 도착했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많은 평양시소년단원 친구들이 꽃다발을 흔들고, 소년단관현악대 몇 개 조가 나와 나팔을 힘껏 불어댓다.
따따따따~
차에서 내려 평양시 학생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역사 밖으로 나가니 "100대버스"라고 불리는 대회참가자용 고급버스들이 늘어서있는거 아닌가,,,
따따따따~
차에서 내려 평양시 학생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역사 밖으로 나가니 "100대버스"라고 불리는 대회참가자용 고급버스들이 늘어서있는거 아닌가,,,
그때 처음으로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고 의자가 뒤로 젖혀지는 버스를 타봤다. 모두 신기하여 의자를 움직여보기도 하고 불도 켜보고 바람도 맞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이번엔 또 마이크까지 설치되어 오락회를 시킨다. 버스에는 유선마이크잭을 꽂는 곳이 창문쪽에 여러 곳이 있어 자유롭게 마이크를 옮겨가면서 노래를 불렀던것 같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평양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각 도별로 열을 맞춰 줄을 세우는데 그 틈에도 대회 주석단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인민문화궁전앞에서 기다리는 배우 오미란을 봤다.
친구들이 신기해서 같이 쳐다본다. 와~ 이쁘다. 모두 저저마다 한 마디씩이다.
드디어 인민문화궁전안으로 들어간다. 내 자리는 아마 앞에서 부터 8번째 줄에 거의 가운데 쪽이 되었다. 양쪽에는 남자애들만 쭉 앉아 있었다. 자리를 바꾸자고 하니 안된단다.
하필 나를 남자애들 속에 넣을건 뭐람... 혼자서 투덜투덜...
함경도 학생들이 사고를 제일 많이 쳤던것 같다. 대회가 시작된 이날 인민문화궁전 대유리가 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휴식시간행사장 밖으로 나갔다가 회의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한 학생이 통유리문을 인식 못하고 그냥 달리다가 박살냈다.
그 외에도 사건사고가 많았다. ㅎㅎ
소년단대회는 3일에 거쳐 진행되었던 것 같다. 대회에서 주석단대표자들인 오은별(북한에서 유명한 꼬마화가) 김일신(현 임수경의원이랑 같이 백두한라 대행진에 참가하여 자작시를 읊어 소문났던 꼬마시인) 오미란( 이름난 영화배우, 한국 소위 말하는 여자스타배우) 또 불붙는 소년단실의 김일성초상화를 품고 화상당한채로 창문밖을 뛰어내려 사망한 한 소년단원의 어머니... 등등 북한의 소위 이름있는 영웅들과 인기인들이 참석했다.
김일성이 참가한다고 했는데 아마 몸이 안좋았던것 같다.
모두 김일성이 나온다고 믿고 있었는데 나오지 않자 얼마나 서운해 하는지. 나도 많이 서운했었다.
저녁에 잠자리는 모란봉여관이라는 데에 잡혀 있었다. 여관방처럼 온돌방인데 한 방에 거의 8명정도 숙박했던것 같다. 식당에서는 흰쌀밥에 고기반찬에 달걀반찬, 미역국, 이렇게 거의 아침 저녁으로 먹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구역별로 모여앉아 총화를 하고 오락회를 하고 밤 11시정도에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하루는 아침 일찍 친구랑 밥먹으러 내려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느 모모군에서 온 남학생이 내 뒤에 앉아 내 잔등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저녁에 잠자리는 모란봉여관이라는 데에 잡혀 있었다. 여관방처럼 온돌방인데 한 방에 거의 8명정도 숙박했던것 같다. 식당에서는 흰쌀밥에 고기반찬에 달걀반찬, 미역국, 이렇게 거의 아침 저녁으로 먹었던 것 같다. 저녁마다 구역별로 모여앉아 총화를 하고 오락회를 하고 밤 11시정도에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하루는 아침 일찍 친구랑 밥먹으러 내려가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느 모모군에서 온 남학생이 내 뒤에 앉아 내 잔등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때는 남녀관계라면 철저했던 저는 입을 꼭 다물고 말시키지 말라고 톡 쏴주었다.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밥먹던 우리 구역 친구가 이 동무랑 사귀고 싶어 그러냐고 그 남학생에서 말하는것이다. 속으로 와~ 너 진짜 까졌구나 하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밥먹던 우리 구역 친구가 이 동무랑 사귀고 싶어 그러냐고 그 남학생에서 말하는것이다. 속으로 와~ 너 진짜 까졌구나 하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그 친구 그 담부터 그 남자애랑 그 남자애친구들한테서 선물을 많이 받아가지고 와서는 내앞에서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그래도 난 못본척 못들은척 ㅎㅎ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웃기지만
회의가 끝나서는 대표증 수여식과 선물증정(대학생가방. 만년필, 3색원주필. 김일성교시록, 김정일 말씀록 등등)이 있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평양시내 구경을 했다. 김정숙(김정일엄마)가 뭍혀있는 혁명열사릉부터 시작해서 옥류관, 만경대유회장, 창광원, 인민대학습당, 창광거리,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소년백화원, 만경대고향집(김일성의 고향), 등등 북한의 이름난 곳은 다 돌아본것 같다.
지금도 혁명열사릉 올라가는 계단이 어찌나 높던지 모학교 책임지도원 선생님이랑 거기 올라가지 않고 계단 밑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잡담을 하던 생각이 난다. 또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돌아보며 금성1고등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관람도 하고 ...
가장 기억에 남는것이 "청춘관"이라는데서 밥먹을 때다.
나는 청춘관에서 처음으로 남자도 화장을 하면 이쁘다는걸 목격했다. 청춘관은 중국식 레스토랑인데 요리사들이랑 접대원들 모두가 남자였다.
화장을 이쁘게 하고 줄을 서서 들어가는 우리의 손에 하얀 수건을 하나씩 건네주는데 이쁘다기 보다는 신기해서 자꾸 쳐다봤다. 북한에서는 남자가 화장을 한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식당에서 먹은 중국빵이랑 음료수는 입에 맞지 않아 그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것 같다.
밥다먹고 나서 주방쪽에 물 좀 얻어 먹을가 들여다 보니 거기에도 총각들이 이쁘게 화장을 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저를 보더니 "아이고 곱게 생겼네,어서 들어와" 하며 반겨줬던 기억이 난다.
만경대 유희장에 갔을때는 친구들이랑 유희기구 타는데 어떤 친구가 한참 돌아가는 기구안에서 "세워주세요"하고 고함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다같이 깔깔 웃어대던 기억도 난다.
또 러시아 사람들이 물보트를 타는걸 보면서 학교에서 조금 배웠다고 "따바리쉬, 따바리쉬"(동무, 동무) 라고 웨쳤던 기억도 나고 한참 대열을 맞춰 행사장을 향하는데 어떤 백인여자가 원피스를 입고 어린애손을 잡고 지나가는걸 보고 "어머 저 여자봐라. 스프링(넌닝)입구 거리를 활보하네. 부끄럽지두 않나?" 하며자꾸 돌아보군했던기억이 난다.
대회일정은 총 일주일이었다.
그동안 집에서 따로 간식을 준비해간 것 없이 빈손으로 갔던 저는 같이 갔던 오빠 언니 친구들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친구 옥이가 제꺼 간식(사탕, 과장 한봉지씩) 가져온 걸 하나도 손대지 않고 과자는 같이 갔던 선생님들께 드리고 사탕만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모여앉아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가족들끼리 쵸콜릿사탕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먹는데 그때 난생처음 그렇게 맛있는 쵸콜렛 사탕 먹어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
..대회에 참가하면서 친구들이랑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돈은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학급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선물을 사고 나서도 국정가격(국가에서 정해놓은 값)이라 별로 비싸지도 않고 하다보니 180원정도를 그냥 남겨가지고 왔다.
그 돈을 엄마한테 드리니 우리 엄마 너무 좋아하셨다.
다른 친구들이 이것저것 사먹을때 먹지 않고 꿍쳐둔 보람이 있었다.
친구 옥이가 제꺼 간식(사탕, 과장 한봉지씩) 가져온 걸 하나도 손대지 않고 과자는 같이 갔던 선생님들께 드리고 사탕만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모여앉아 같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가족들끼리 쵸콜릿사탕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먹는데 그때 난생처음 그렇게 맛있는 쵸콜렛 사탕 먹어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
..대회에 참가하면서 친구들이랑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돈은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학급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선물을 사고 나서도 국정가격(국가에서 정해놓은 값)이라 별로 비싸지도 않고 하다보니 180원정도를 그냥 남겨가지고 왔다.
그 돈을 엄마한테 드리니 우리 엄마 너무 좋아하셨다.
다른 친구들이 이것저것 사먹을때 먹지 않고 꿍쳐둔 보람이 있었다.
엄마가 좋아하고온 가족이 좋아하니 너무 행복했다.
대회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후 우리 책임지도원선생님께서 전교생들 앞에서 그 누구의 의지나 도움도 없이 혼자 당당하게 국가회의 대표로 뽑혀 참석하고 온 우리학교 모모학생입니다. 라고 온 학교 언니오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랑해주시고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우리 모모학생 너무 자랑스럽다고 칭찬도 하시고 학교에서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마냥 행복했던 그 나날들 선생님들의 축복과 사랑속에 친구들의 부러움속에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지금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또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1991년 6월 평양에서 열렸던 '소년단창립 45돐기념 전국 소년단제4차대회' 영원히 지을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시간. 오늘도 그때 기억 되살리며 글을 올리는데그때로 다시 돌아간 느낌에 너무 행복했다.
대한민국에도 그때 그시절 함께 했었던 친구들도 많이 와있으리라 본다.
근 20여년도 더 지난 옛기억을 떠올리며 쓰느라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회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온 후 우리 책임지도원선생님께서 전교생들 앞에서 그 누구의 의지나 도움도 없이 혼자 당당하게 국가회의 대표로 뽑혀 참석하고 온 우리학교 모모학생입니다. 라고 온 학교 언니오빠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랑해주시고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우리 모모학생 너무 자랑스럽다고 칭찬도 하시고 학교에서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마냥 행복했던 그 나날들 선생님들의 축복과 사랑속에 친구들의 부러움속에 행복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지금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또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1991년 6월 평양에서 열렸던 '소년단창립 45돐기념 전국 소년단제4차대회' 영원히 지을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시간. 오늘도 그때 기억 되살리며 글을 올리는데그때로 다시 돌아간 느낌에 너무 행복했다.
대한민국에도 그때 그시절 함께 했었던 친구들도 많이 와있으리라 본다.
근 20여년도 더 지난 옛기억을 떠올리며 쓰느라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점 양해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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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8
숙녀님의 댓글
항상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다른 분들도 북한에서 가장 행복했었던 사연이 있으면 여기에 적어주셔서 함께 그때로 돌아가봤으면 좋겠네요.ㅎㅎ
큼이님의 댓글
폰으로 이글을 보면 닉네임이 누구신지 다 보이는데요, ㅎㅎ ~~~
3편으로 쓰신글 잘보았습니다,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ㅎㅎ
똘래님의 댓글
이런 추억이 있어 좋으시겠어요.
글쓰는 게 취미지만 별로 자랑할 만한 행복한 기억이 없는 저는 조금 샘이 나네요.ㅎㅎ..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길에서 친구나, 선생님들 보면 숨어다니고, 맨날 얼굴이 부어가지고 옷도 없어서 남의 옷 빌려입고 거리에서 옷 당장 벗어내라고 숱한 사람들한테서 창피도 당하며 얼굴도 못쳐들고 다니고, 공장에서 맨날 배고품에 적응도 제대로 못해서 몇달 못버티고 나오고, 사람이 바보되는건 순간이더라구요. 어릴때 김일성일가가 맨날 강조하던 헐벗고 굶주리는 남녘의 어린이들이라눈 그 단어가 내게 현실로 찾아올줄이야.
똘래님의 댓글의 댓글
좋은 추억만 간직하고 삽시다.
저도 고향에서의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있답니다.
쵸친과바라케님의 댓글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정답님의 댓글
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빌립님의 댓글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황금같던 그 시절이 지금 제 삶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일부분이 되어 자심감을 유지시켜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어서 참 다행인듯 합니다.~^^
유수님의 댓글
실은 제가 여기 사이트 처음 시작할때 회원 중 한명이지만 일이 바빠 오랫동안 들어와 보지 못했었습니다.
지금은 은퇴 나이가 되여 (Pensioner) 국가에서 연금 받으며 살게되면서 시간이 되여 다시 들어와
여기 저기 보던 중 님의 글을 보게 된것을 다행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올려진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저 자신도 어느덧 그때 그 시절에 살고 있을때의 섬세한 감정까지 느껴지네요
저는 1970년대 중반 대학생시절 보천보 답사로 혜산을 통해 리명수,보첩보, 청봉숙영지,삼지연,무두봉, 백두산천지, 그리고 대홍단을 통해 무산으로 갔고 거기서 청진행 기차를 탓고 청진에서 급행열차로 평양으로 돌아 온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혜산을 하루동안 구경한적이 있습니다.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유수님의 댓글
저는 유학생 파는 아닙니다. 80년대 후반 국가 공무임무로 외국 장기출장 중 같은 호텔에 체류중인 한국 기업 세일즈맨들과 우연히 만나게 되였고
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것으로 서로 호기심이 있는 터라 우연히 만날 때마다 몇 마디씩 이야기 한 것이 다른 북측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였고 그것이 상부에 보고되면서 졸지에 스파이로 몰려 송환되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여 할수 없이 다른 나라로 이동 ( 북한여권으로 한국 사람이라고 속여 비행기표를 샀고) 유엔 HCR에 등록하고 근 1년을 기다려 지금의 나라로 오게 되였습니다.
떠나던 그때 내가 탄 버스가 공항으로 가던 중 마침 북한 대사관 앞 도로를 통과하게 되였는데 그 대사관에서 외교관 친구들과 장기, 주패놀이를 하던 생각이 떠 오르면서 마음은 너무나도 찹착 해졌었습니다. (지금 떠나면 고향엔 아예 돌아 갈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떠난 이들의 모두가 깊은 사연이 있듯이 저도 그런 사연 중 하나입니다.
실은 아버지 고향이 충정북도라, 그때 그 한국 사람들 중 한명이 고향이 충청도라 하여 관심을 가지고 몇 번 물어 본 것이 이렇게 저의 운명이 바뀌게 되였네요.
고향은북쪽님의 댓글의 댓글
그런 일을 겪으셨네요.
그것 또한 유수님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운명이자 숙명이었나봅니다.
의도치 않게 생긴 일들로 인한 우리의 선택.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한 삶의 궤도가 바뀐 전환점.
내 육체조차도 내것이 아닌 곳에서 뇌의 기능을 상실한채 살아왔던 우리 탈북민들.
그래서 자유를 누릴 기회가 왔어도 더욱더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겁니다.
다행히 저는 10대의 행운과 추억이라는 보약으로 마음을 충전해가며 오뚜기처럼 살 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후희는 없으신지요.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혹시라도 한국에 오실 일이 있으심 한번 뵙고 싶네요.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유수님의 댓글
냉정한 삶의 현실이 그런 상념적인 것을 허용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 하는 것, 그리고 그에 합당한 노력이 저 자신을 지탱해주는 밑천이 아닐 가 합니다.
그리고 운명, 팔자 그런 것 들이 실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저의 지나 온 삶 과정에서 강 하게 느낀 점이기도 합니다.
마치 자석에라도 끌리 듯 저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제가 그렇게 끌려 가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은 단체 관광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1990년도 초반엔 서울 뒷골목엔 산동네 판자촌도 많았고요 농촌에는 도로 포장이 거의 안되어 있었는데요 몇 년 후에 가보니 많이 달라 졌고 또 몇 년 후에 가보면 아주 많은 것들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살기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다시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면 맛 나는 식사 대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셨으면 하는 것이 같은 북 출신인 저의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