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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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로 이 세상을 살면(연제8)
2003년2월, 나는 다니던 목단강 민족병원을 그만 두고 중국 청도 시로 나왔습니다.
2년 동안 민족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내가 제일 뼈아프게 느낀 것이 있다면 우리 같은 기술자들이 북한 정권에 수도 없이 착취를 당하면서 살고 있은 것입니다. 북에서 내가 받는 노임은 140원이였습니다. 거기다 소장 비 5원을 더 해서 145원을 받았습니다. 기술이 있던 없던 환자를 고치던 못 고치던 상관없이 급수시험에만 합격하면 동급의 노임을 받는 북한의 제도는 인간의 기능을 말살하는 제도입니다.
목단강 민족병원에서의 나의 노임은 원화로 월2500원선에서 시작하여 환자를 치료하여 거기서 나오는 수입에 따라 보수를 더하기로 계약하였기에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월3700원까지 높아졌습니다. 나는 자신의 기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감히 자본주의 제도에서도 나의 의술로 도전하여 내 생계를 원만하게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한의원을 꾸렸습니다. 꾸렸다가 환자가 없어서 실패하면 어쩔까 싶었지만 워낙 빈 손이였던 내가 여기서 잃으면 내 노력과 시간만을 잃는 것인데 두려워 할 것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청도 시에는 한국 기업이 많은 곳입니다. 이런 특유한 조건에 의해 동북의 조선족들도 많았고 중국 노동자들도 많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료도 상품으로 간주하기에 나는 홍보하는데 심혈을 기울렸습니다. 한국회사마다 찾아다니면서 위생 강의도 하고 건강관리에 대한 홍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포신문과 동포들이 운영하는 시장에 나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청도에서 나를 도와주던 명옥씨도 얼마 전 탈북자들의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그 당시 나도 그녀도 서로가 탈북자임을 몰랐습니다. 그때 사심 없이 나를 도와준 명옥씨에게 이 기희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환자가 줄을 서고 그만치 수입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심도 생기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저녁시간에 자리에 누우면 북한에서 고생할 어머님과 아내와 딸, 그리고 손녀와 손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히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습니다.
5월이 였습니다. 막내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맏언니가 중국에 왔다고...
맏딸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하여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워낙 연약한 몸매였지만 그동안의 고생으로 더욱더 쇠약했습니다. 그는 눈물도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속으로 흑흑 느끼면서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정이 꽃제비로 전락된 사연을 안전부 호안부부장으로 있는 둘째딸의 시아버지가 기회가 있어 중앙에서 온 간부에게 제기 한 것이 발단이 되어 군보위부장과 도보위부 반탐과장과 담당보위지도원이 직위 해제 되여 보위부에서 제대 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아내를 식료공장 부업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군당에서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아내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안기부 간첩이 아니라도 조국을 배반하고 외국으로 도망 친 것도 역적이니 강 유와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혼 조건이 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 권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초막이지만 몸 둘 곳도 생기고 부업 지 주변에 땅뙈기도 일굴 수 있어 아내와 맏딸은 죽기내기로 땅뙈기를 일구었습니다. 한곳에 많은 면적의 땅을 일구면 빼앗길까 싶어 조금씩 여러 곳에 뙈기밭을 마련했습니다. 내가 보낸 돈으로는 남몰래 식량을 사다가 끼니를 이으면서 감시가 소홀해지기를 기달렸습니다.
악착같이 일한 덕으로 식량도 여분이 생기고 배를 곯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는 기회를 봐서 맏딸을 탈북 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아내는 맏딸까지 탈북 시키고 자기는 손녀와 손자를 데리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탈북 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얘들이 있으면 감시가 그만큼 소홀하지만 얘들과 어른이 함께 없어지면 탈북 한다고 추적할 것이기 때문에 아내가 내놓은 꾀라 할까...일밖에 모르던 아내가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굿굿이 일어서서 앞길을 헤쳐 가는 모습을 들으면서 그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돈만 있으면 탈북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 였습니다. 그리고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부업지에 있는 것이 탈북 하는데 참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되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아내와 얘들을 데려올 생각을 하였습니다.
11월 중순 어느 날이 였습니다.
맏딸 연화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셋째와 막내 동생이 공안에 잡혔다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귀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면서 금시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메슥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역적으로 취급받는 강유의 딸이란 그 조건만으로도 얘들이 북송만 되면 처형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때문에 보위부가 당한 수모를 보복하기 위해서도 내 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 가슴은 더욱 타들었습니다. 청도에서 목단강까지 가는 시간이면 북송 될 것이고 또 내가 간들 공안과 어떻게 접촉할 것이며...나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냥 십자가 아래 엎드려 눈물을 쏟으면서 주님께 기도만 했습니다.
희와 비가 엇갈려 나를 괴롭히던 2003년은 물러가고 새해 2004년이 왔습니다.
얘들이 잡혀 북송된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가하였습니다.(내가 임대 맡은 주택 중에 제일 널따란 방을 예배실로 꾸리고 전도사를 모셔다가 예배를 시작한 것이 근 1년이 되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교회에 의하여 생명을 구원 받았고 교회에서 새롭게 태여 나서 험하고 어려운 나의 앞길을 추호의 주저도 없이 헤쳐 왔습니다. 나처럼 의지 할 데 없고 고독하고 버림받은 인간이 매달리고 가슴과 육신에 쌓인 원한과 억울함을 쏟아낼 곳은 이 세상에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처럼 막연하고 기대할 수 없던 일이 내가 교회에서 생활하는 그때부터 풀리기 시작하고 앞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였습니다.
두 딸들이 북송 된지 4개월 되는 3월 중순에 그처럼 기달리던 아내와 두 딸과 손녀가 탈북하여 중국으로 왔습니다. 나는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청도로 데려왔습니다. 5년 만에 마주한 가족이 였습니다. 울며 웃으며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딸들 사이에 비여 있는 둘째딸 생각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손자들 생각, 그리고 막내동생네 집에서도 정을 붙이지 못한 어머님께서는 나를 찾아 남양까지 오셨다가 안전원들에게 붙잡혀 청진 집결소에서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내 가슴은 찢어지듯이 아팠습니다.
(두 딸들이 북송되면서 겪은 눈물 나는 이야기와 홍원에서는 딸들의 행처보다는 나의 행처가 더 궁굼 하여 안전부나 보위부에서 그리고 나와 다정했던 사람들과 수 십 년을 병원에서 우의를 돈독하게 하였던 동료들의 관심이 매우 컷다는 것만 여기에 언급하고 줄입니다)
이제는 하루 빨리 중국을 떠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내가 사는 데는 문제가 되질 않지만 얘들 때문에 한시도 시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끈질긴 탐문 끝에 몽골 국경을 넘어서 대한민국으로 갈수 있는 통로를 찾았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가계를 정리 했습니다. 중국 원화로 수천원이나 되는 임대료와 수천원에 달하는 한약재 그리고 중탕기, 제분기, 냉장고를 비롯한 수만원에 달하는 재물을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그동안 저축했던 돈 중에서 한화 6백만 원은 대한민국에 송금하고 미화5백 달러를 환금하여 휴대하고 나머지 여유 돈으로는 아내로부터 딸들에 이르기 까지 금 귀걸이와 금반지, 금 목걸이를 선물로 사서 주었습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가야하는 월경 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생사를 건 모험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마음에서와 그동안 아빠 때문에 맘과 몸으로 당한 고생을 위로하는 맘으로 선물을 마련했던 것이 였습니다.
4월9일 몽골 국경을 넘기 위하여 청도를 떠났습니다. 안내자는 대한민국으로 가겠으면 자기를 찾아 내몽골로 오라는 것입니다. 처음 약속할 때는 청도에서부터 국경까지 인도해 준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 였습니다. 4월12일에야 안내자가 있는 곳에 당도 했습니다.
안내자는 동북 조선족이 였습니다.
안내자는 몽골 국경에서 수 백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네 시간을 가다가 북쪽으로 두 시간을 가면 몽골국경 철조망이 나타나니 그곳을 넘어가면 된다” 안내자가 우리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안내자의 안내 전부였습니다.
내가 국경까지 안내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안내하고도 돈을 받을 수 있냐고 하니깐 당신들을 위해 내가 왜 그런 위험한 곳까지 가야 하는 가고 되려 반문하는 것이 였습니다
이들은 탈북자들을 도와주고 그 댓가로 돈을 받는게 아니고 탈북자들의 생명 따위엔 관심도 없이 탈북자들의 처한 부득이한 환경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도 더럽게는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북 조선족 배후에는 탈북자가 블로커로 있었습니다. 거액의 돈을 받고 안내자의 역할을 하려면 국경까지 무사하게 넘어가게 하는 책임까지도 안내자가 져야하는 것이 계약상 도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이 탈북자들을 위험이 항시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국경으로 추호의 책임감도 없이 이런 식으로 안내하여 국경에서 수없이 붙잡혀 북송되고 지어는 중국 국경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는 물러설 곳도 없었습니다. 나는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중국지도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현 위치에서 서쪽으로만 곧추 가면 몽골 국경이 반드시 나지게 되었습니다. 안내자가 말하는 곳은 안내자 자신도 가보지 못한 곳이였습니다. 그러니 안내자의 말대로 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대로 하는게 더 확신성이 있었습니다.나는 마트에서 음료수와 빵과 반찬을 사람마다 준비하게 하고 옷은 간편하게 신발은 운동화로 갈아 신게 했습니다. 앞길을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온가족이 동행하니 마음이 든든하였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잡히면 다 같이 죽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이 길은 가야했고 이 길을 가야만 우리가족은 살길이 생기는 것이 였습니다.
저녁8시에 떠나서 아침10시에 몽골 국경을 넘었습니다.
몽골에서는 미화5백 달러를 받고 몽골수도 울란빠도르까지 안내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 운이 좋게 기차를 타고 4월13일 아침9시에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들어 갔습니다.
몽골에서 1개월을 보내고 2004년5월17일 대한민국에 입국하였습니다.
맺는말
혹시 어떤 분들은 내가 실명을 공개하여 북에 있는 동생들이 피해를 볼까싶어 걱정을 하시는데 저도 그런 걱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모든 것을 저질러 놓은 것이 북한의 사회제도이기에 그 제도의 부당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그리고 남한에 북의 체제를 동조하거나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을 감안하여 이글을 씁니다.
사회주의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할 곳이 없으며 또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독재를 낳는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노예를 만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을 받아주고 재생의 길을 마련해준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 기회에 머리 숙여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여러분들을 위해 잘 정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명이 다 할 때까지 아픈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보아주시여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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