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 탈북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수기

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본문


나를 탈북하게 한 자들(연제4)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하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100일간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다하고 없는 간첩 누명까지 씌워 한인간의 인권을 무참하게 짏밟아 놓고도 사죄와 보상도 없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였습니다.

 


나는 도보위부 반탐과장과 군보위부장과 담당보위지도원을 상대로 중앙당에 신소편지를 냈습니다. 독재체제를 모르는 나는 “중앙당과 김정일 장군님”께서만 아시면 억울한 이 문제를 풀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한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편지를 냈지만 6개월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 였습니다. 체신소 보위지도원에 의하여 신소편지가 상달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평양으로 회의 가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평양에 가서 편지를 붙이게 하고 중앙당 유자녀 과에도 신소편지를 냈습니다.

 

가정의 경제상황은 나의 건강상실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3 년 동안 노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그냥 은행에 저금 되였습니다. 쌀 공급은 설날과 김정일의 생일날 그리고 김일성의 생일날, 국경절과 당 창건일에 명절을 쇠라고 맛보기 식량을 공급하다가 그것도 1997년부터는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아내가 식료공장에 다니는 덕분에 강냉이 밥이라도 굶지 않고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어려움은 나뿐만 아니라 북 한민 전체였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몸보신에 쓰라고 찹쌀이랑, 닭이랑 나 몰래 문지방에 놓고 간 이름 모를 사람들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도 남들이 하듯이 집에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로 쌀도 바꾸고 수산물도 바꾸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울분과 저주의 바닥에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로시아나 중국이 왜서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가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생애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1998년은 지나가고 1999년도도 반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나의 신소에 의하여 중앙당 위임을 받고 비사(비사회주의 검열) 구루빠가 홍원에 와서 군중들의 반영을 조사하는 한편 나의 문제를 심의하였습니다.

 

안기부 간첩 건은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내가 진료소를 핑계 대고 수척(6척의 쪽배)의 배를 무어 자본주의를 조장 시켰다고 나를 추궁하는 것이 였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 당에서 아~ 하면 하부말단에서도 아~ 해야지, 조금 어렵다고 저마다 외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손을 내밀면 우리나라 위신이 뭐가 되는가, 그걸 생각해 봤는가!”

이게 비사구루빠 책임자가 나에게 한 결론적인 발언이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에서 굶어죽으라고 작정하고 쌀 공급을 중단했는데 살자 한 것부터가 당을 배반한 것이고 역적인 것입니다.

 

굶어 죽는 것~ 거기에 김정일 식 애국주의가 있고 김정일 식 충성심이 있고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을 일편단심으로 받들어 모시는 혁명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던 김정일의 구호는 한낱 속임수였으며 말장난에 불과 하다는 것이 수백만의 아사자에서 허실 없이 증명 되였습니다.

 

내가 당적인 처분을 기달 리라는 통지를 받은 것은 1999년7월이 였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나날이 더해만 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에게 천청 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오로에 있는 55호 단련 대에 내가 가게 비사구루빠가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증을 갖고 소장 직책을 갖고 간다 해도 55호에 가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 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55호 단련대에서 허약에 걸려 죽었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담당구역에도 55호에서 허약에 걸려 집에 왔다가 숨진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나는 며칠을 두고 잠을 잃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내는 무조건 중국으로 떠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만 갈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두고 이렇게 간다는 것은 영영이별을 뜻하기도 하였기 때문이 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는 가족 전체가 떠나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단속에 걸릴 수 있으며 그렇게만 되면 온 가족이 진짜로 안기부 간첩 누명쓰고 처형 당 할 것이라고 하면서 빨리 떠날 것을 강권했습니다.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한 나를 부축하여 막내딸이 동행하였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아니라 피가 솟구쳐 흘렀습니다.

일생을 노예처럼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하였고 그 어떤 불평도 없이 당과 수령을 위해 헌신한 그 대가로, 내형제가 굶어 죽고 내 담당구역의 수많은 환자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넘 억울하고 기가 막혀 일군들을 비난했다고 안기부 간첩혐의를 씌워 나를 매장 할 려 하였고 그것도 부족해서 명색 좋은 노동 단련대에 보내 죽이려고 하는 현 정권에 대한 피에 맺히는 원한으로 온 육신이 떨렸습니다.

 

기차 빵통 꼭대기에 비닐박막을 쓰고 엎드려 탈북을 하기위해 국경도시 무산으로 가는 도중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막내딸에게 이끌려서 움직였습니다.

조국을 떠나는 아쉬움도, 고향을 떠나는 아쉬움도, 가족을 다시 볼 수 없으면 어쩌랴 싶은 마음도 없이 그리고 가다가 붙잡히면 어쩌랴 싶은 마음도 없이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오직 탈북하기 위해 생명이 무언지 그저 억울한 죽음을 죽지 않기 위해 그 땅을 떠났습니다.

 

딸의 어깨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건너는 나의 폐부에서는 흐느낌 같은 괴로운 탄식이 속구쳐 오르면서 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두만강에 흘러내렸습니다.

1999년9월30일 나는 딸과 함께 두만강을 무사히 넘었습니다. (계속)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12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1 건 - 1 페이지
번호
제목
글쓴이
게시판 전체검색
상담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