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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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에서 3개월 (연제3).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내가 눈을 뜬 것은 6월26일 밤이 였습니다. (37시간을 정신 없이 잤습니다) 회미한 불빛 속에 엇갈리게 누운 사람들 모습이 송장같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잠이 덜깨고 정신이 덜든 상태여서 멍하니 감방 쇠창살만 바라보고 있는데 유령같이 계호원이 나타 났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계호원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조용하라고 신호를 주고는 쇠창살 앞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빽빽하게 누워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계호원은 내가 보위부에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물었습니다. 그사이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이야기 했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그의 기색은 신중했습니다. 그 계호원은 신포 안전부 사람이 였는데 홍원에 온지 오래 되여 나도 풋면목이나 알고 있는 사이였습니다.
아침 기상 시간은 정확하게 6시 였습니다. 잠깐사이에 담요를 정리하고는 쇠창살을 향하여 두 줄로 정좌로 앉았습니다. 감방사람들은 나를 흘끔흘끔 훔쳐보았습니다. 여위여서 광대뼈만 앙상한 사람들, 사람냄새가 아닌 송장에서 나는 그런 비슷한 냄새가 감방 안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넓이 180센치메터, 길이 약3메터되는 공간에 12명이 되는 사람이 엇가로 모재비로 잠니다. 바닥은 판자로 되었는데 공명이 잘되게 밑층을 파고 콩크리트로 시공하여 벼룩이를 죽이는 소리까지 들리였습니다. 아침 식사는 8시에 주는데 쭈글쭈글한 늄식기에 통 강냉이 삶은 것과 새끼손가락만한 무짠지 한 쪼박지가 모두였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면서 보니깐 다른 사람의 식기에는 무짠지가 세쪽씩 있는데 유독 내것 만은 한쪽인것입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3일이 지났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다싶어 배식구를 찬찬히 살피니깐 배식하는 사람이 무짠지 한쪽을 슬쩍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런데 내 밥식기가 중간쯤에서 또 무한쪽과 강냉이 삶은 것이 슬쩍 없어지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순간에 성이 벌컥 났지요. 아무리 개 같은 세상에 살지만 감방에 까지 와서 저러면 안된다싶어 밥 식기를 쇠창살 쪽으로 댑다 던지면서 고함 질렀습니다. 일은 그제야 터지고 말았습니다. 계호원이 달려 나오고~~두 사람은 뒤짐 지고 쇠창살을 이마로 받는 벌을 받고 나는 벽을 마주하고 종일 서있게 하였습니다.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그들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동정이 갔지만 감방 안에서는 자기를 지켜야 살아 남는 것임을 나는 그때 알았습니다. 계호원들은 밤마다 술을 마시고 근무를 섰습니다. 죄인들에게서 나는 이름 못할 냄새와 감방의 악취, 그리고 누렇게 뜨고 뼈골이 상접하여 백골이 방불한 죄인 아닌 죄인들을 살핀다는게 그 직업도 지옥 같은 직업이였습니다. 밤이 깊어 안전부 본청사에서 모두 퇴근하면 감방에는 때때로 이색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어느날 저녁이였습니다. 얼근하게 취기가 오른 계호원이 느닥 없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소장~외화벌이 초급당비서 알아~” 나의 치료도 받은적이 있어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계호원이 “이제부터 외화벌이 초급당비서 아드님께서 자기의 전적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다. 알았지~~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외화벌이 초급당비서가 아들 때문에 곤경을 치룬다더니 여기서 그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생각밖이였습니다. 외화벌이 초급당비서 아들은 자기의 전과를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산외화상점에서 쎄꼬 시계만을 훔치던 일, 일본귀국자네 집에 3일간 잠복해 있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외화 돈을 슬쩍한 이야기...그런데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데로 흘러갔다. 보위지도원네 집에 들어가서 소나무 텔레비를 훔쳤는데 어찌 되여 그것이 탄로가 되려 해서 되 갔다 놓은 것, 그리고 이번에는 군당책임비서네 집을 조절했는데 창고에 색텔레비가 무려 다섯 대가 있는걸 2개만 슬쩍했는데 그게 들통나서 이렇게 잡혔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관은 책임비서가 자기네는 텔레비를 잊어버린적이 없다고 해서 사건을 마무리 못해 형을 받을 수 없어 지금 이렇게 썩구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가진놈은 저렇게 많이 가지고도 그게 탄로가 날까 두려워서 도둑 마치고도 도둑 마쳤 다는 소리를 못하고 있는 것이 였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이러루한 소리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규률을 세운다고 서로 때리게 하던지 쇠창살을 이마로 받게 하던지 아니면 콩크리트 벽을 이마로 받게하였습니다. 밤은 밤대로 이와 벼룩이 때문에 견딜 수 없었지만 감방생활10일이 지나자 벼룩이가 물고 이가 득실거리는 속에서도 누우면 금방 곯아 떨어졌습니다. 그만큼 감방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신체를 좀먹는 곳이 였습니다.모든 수감자들은 하나같이 붙잡히지 말아야지 붙잡히면 그때는 끝장이라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차차 감방생활을 하면서 느껴지더라구요. 장수도 잡혀서 감방에 처박히면 용빼는 수 없다는 말 하나 틀린데 없었습니다. 감방에 갇힌지 5일 지나서 면식이 허락 되여 매일 점심이면 집에서 가져온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약20일이 되었을 때는 도보위부에서 지도원, 도안전부 예심과에서는 과장이 와서 나로부터 사건의 경위를 다시금 조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도 안전부 예심과 과장이 문의하고 도 보위부 지도원은 자기 수첩에 기록만하고 일체 묻지를 았았습니다. 도 안전부 예심과장이 사건경위를 다 듣고 나서 지금 고난의 행군 시기라 일군들도 신경이 예민해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 자기만 결백하면 아무 때던지 당에서 알아 줄 것이라고 고무적인 말로 나를 위안해 주는것이였습니다. 7월27일 대의원 선거를 감방에서 치루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면도도 시키고 옷도 손질해서 입게 하고 김일성빼지도 달게(나의 당상은 보위에서 어느 작자가 꿀꺽했음)하고는 선거에 참가하는 7명의 수감자들을 따로 식사시키더니 예심과 사무실에 가서 투표에 참가 하였습니다. 투표함을 가지고 왔던 여맹일군이 나를 보더니 너무 놀라는 것이 였습니다. 안기부 간첩이 대의원 투표에 참가하다니~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상식이 맞지 않는것이니 놀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방생활도 이제는 습관이 되는 모양인지 조바심도 사라지고 그저 꼭 이 사건을 해명하고야 말겠다는 그 한가지 생각으로 모든 시간에 걸쳐 대응 방법을 모색하였습니다. 이제는 감방에 갖힌지 2개월이 넘어서였습니다. 예심과 박과장이 현장검사를 간다하면서 내가 일하던 진료소에 계호 책임자와 박과장과 셋이서 나갔습니다. 안전부에서 50메터쯤가서 나의 손목에서 수갑을 풀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진료소로 가는데 가고 오는 사람들 놀란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는 것이 였습니다. 그때 그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진료소 어귀에서 아내와 셋째 딸이 나를 기달 리고 있었습니다. 인민군대 군복차림의 셋째딸, 그는 강원도 김화쪽 38선에서 군복무중이였는데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넘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인차 내사건 때문에 보위부가 강제대 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였지요. 참으로 억이 막혔습니다. 딸은 나의 가슴에 머리를 박고 소리 내여 울었습니다. 박과장도 계호 책임자도 먼산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약10여분간 이야기를 나누고 진료소로 갔습니다. 진료소에서는 법석판이 벌어졌습니다. 안기부 간첩이라던 소장이 버젓이 대낮에 진료소에 나타나서 점심식사를 하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진료소 주변의 사람들과 수산사업소에서도 나를 보려 찾아 왔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박과장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소장이 일을 많이 했구만“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못 먹는 술도 한잔하고 얼굴이 벌개가지고 안전부로 돌아오는데 안전부 정문에 나의 사랑하는 어머님과 손녀 지혜가 나를 기달 리고 있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어머님을 보는 순간 눈물부터 나는 것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내손에서 자라다 싶이 한 다섯살 되는 손녀 지혜는 겁먹은 시선으로 나를 빤이 쳐다 보면서도 나를 피하는 것이 였습니다. 아마도 모습이 많이도 변한 할아버지가 무서웠겠지요. 어머님은 손에 쥐고 있던 도시락을 나에게 주면서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자네 오늘 생일이네“ 라고 말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과장이 웃으면서 ”생일을 지금 쇠고 오는 길인데 근심하지마소“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 말에 나는 박과장의 왜서 현장검사란 구실을 만들어서 진료소로 나를 데리고 갔는지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만 울컥 눈물이 쏟구쳤습니다. 어머님께 인사도 못하고 그대로 안전부 감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감방에서 3개월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농장소 5마리를 잡아먹어 사형 판결을 받고 제 고장으로 사형 받으려 가는 사형수, 알늄 실은 기차방통을 수리 선에 넣고 50톤되는 늄을 몽땅 도적질한 여자 사건, 사위와 아들과 셋이서 외손자와 친손자를 잡아 먹은 사건, 내가 석 달간 감방에서 보고 들은 걸 여기에 다는 옴길 수 없어 이만 줄입니다 . 9월25일 보위부에 연행되여 100일만에 병보석으로 집에 왔습니다. 키180센치메터 체중45킬로그람. 영양실조 이게 병보석 진단이였습니다. 당생활은 계속 하며 소장직위는 당분간 몸보양이 끝날때까지 유보한다고 나에게 통보하였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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