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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

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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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2)

함경남도 도보위부 반탐과장이란 사람은 마른형의 40대 남자였습니다. 눈에 살기가 번뜩이고 상대방의 가슴속까지 투시할 뜻한 매서운 눈을 가진 전형적인 반탐일군다운 사내였는데 첫날 오후(6월16일 오후)에는 남조선안기부로부터 간첩임무를 받은 자료를 상세하게 적어내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주었습니다. 나는 어이없었지만 내가 중국에 있는 외가 집에서 돈을 받게 된 경위를 종이 우에 서술했습니다. 한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하고 날이 저물어 보이지 않으니 보위부 보이라 실에 있는 철관에 수갑을 채워 뒤로 묶었 놓았습니다.


 

일어 설수도 누울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밤새도록 모기떼가 달려들고 습하고 무더위 속에서 흐르는 땀을 무릎에 대고 닦으면서 이 세상에 태여 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원망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공급에만 의존하는 사회주의 경제 운영에서 서민들에게 그 공급을 중단하면 결국 죽으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는 달리 시장에 나가 쌀 한 그람도 살수 없는 북한에서는 쌀 공급 중단은 곧 서민에 대한 사형판결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원님도 3일 굶으면 도둑질 한다고 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둑 아닌 도둑누명을 썼으며 살길을 찾아 탈북 했는지 그 수를 아직까지 똑바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가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도 배고프면 배고프다하고, 쌀 공급을 하게 되었는데 못하면 왜 공급 못하냐고 문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을 했다고 남조선 안기부 간첩으로 몰아서 처형 할 려는 것은 고문 중에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다음날(6월17일)이였습니다.

아침이 되자 식사는 저들이 먹다 남은 것을 개밥 그릇 같은 데다 담아서 가져왔습니다. 나는 식사를 거절했습니다. 애숭이 보위소대 전사가 흥~하고 코 방귀를 끼고 그대로 가져갔습니다. 그길로 보위부 청사 반탐과에 올라가서 도 반탐과장과 마주 앉았습니다.

도보위부 반탐과장 왈~~야, 제대로 똑바로 써, 그러면 용서 받을 수 있어 있는 사실만 쓰란 말이야, 알았어~

강 유 왈~예, 알았습니다.

나는 천연스레 답변하고 진술서에 어제 쓴 그것대로 썼습니다. 약 1시간쯤 지나서 밖에서 들어온 도보위부 반탐과장이 다 쓴 진술서를 자기 앞으로 끄당겨 보더니 진술서를 벌컥벌컥 번지다 후닥닥 일서서면서 주먹으로 나의 볼을 죽으라고 줴박는 것이 였습니다. 눈에서 시퍼런 번개 불이 확 일더니 통나무 넘어지듯 콩크리트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입에서는 검니가 주먹에 맞아 빠져서 피와 함께 입안에 가득 했습니다. 이어 협구리을 구두 발로 차고 밟고 얼마나 되었는지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을 뜨니 보위부 보일러실이 였습니다. 날은 이미 컴컴했습니다, 옆구리가 쿡쿡 쑤시고 수갑이 채워진 손은 퉁퉁 부어서 움질 일 수 없었고 웬일인지 온몸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왼쪽 볼은 부어서 혀까지 놀릴 수 없었습니다.

근데 이상한 것은 마음이 편안한 것이 였습니다. 그리구 이런 것이 고문이라면 얼마든지 견디여 낼 자신감도 생기였습니다. 그런데 보위부는 역시 보위부 였습니다. 나를 저녁에 곱게 결심이나 다지면서 자라고 놔두지 않았습니다. 보위소대 전사가 빈 도람통을 내 앞에 가져다 놓고 커다란 망치로 쉴 사이 없이 두드리는 것이 였습니다. 처음엔 귀가 멍멍하고 닭살이 돋더니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이 흔들흔들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먹은 것이 없는 창자가 금시 입으로 나 올 것만 같이 메슥메슥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병사들이 교대시간이 되어 도람통 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온몸이 그대로 땅에 잦아 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밤새 자지 못하니 아침에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보위소대 병사들에게 끌려서 반탐과에 갔습니다. 나는 진술서 쓰기도 거부하였습니다. 보위부 놈들이 나에게 안기부 간첩이라고 모함할 정도면 이미 각본은 짜졌고 나에게서 허위진술만 받아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 였습니다.


 

이렇게 3일이 지났습니다(6월19일)

아침이 였습니다. 나에게 집에서부터 급식이 왔습니다. 안면 있는 보위지도원이 낮으막한 음성으로 “집에서 어제 저녁에 알고 오늘아침부터 급식하기로 승인 되였소”하고 하면서 붓고 터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내 팔목에서 수갑을 벗겨주면서 식사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그 밥그릇을 안고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내내 집에서 나 때문에 걱정할 어머님과 안해와 자식들, 그리고 동생들, 그리고 혈육 같은 친구들 모습이 가슴에 맺혀서 나를 괴롭혔는데 이제는 그들이 안다니 시름도 놓이고 그리고 그들은 내가 죽어도 안기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고 그럼 밖에서도 사건을 밝히노라면 나의 억울함이 밝혀지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가슴에 차올랐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잠을 재우지 않고 낮이면 쉴새없이 갖은 방법을 다하여 심문하였습니다.

홍원중학교 교장선생은 중국에서 60년대에 북한에 나왔는데 가족이 굶어 죽게 되니 중국에 있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물건 속에 성경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위부가 그걸로 그를 정치범으로 몰아 수용소에 보내려 했는데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기 때문에 석방했다고 하면서 나더러 고집 쓰지 말고 빨리 자수하라고 회유하는 것이 였습니다. 후에 안일이지만 교장선생은 안전부 감방에서 3개월이나 감금 되여 있었습니다.


 

7일째 밤도 재우지 않았습니다. 집의 급식도 3분1정도만 나에게 주었습니다. 이제는 낮과 밤의 구별도 모르겠고 컴컴한 보일러실에서 밤과 낮으로 빈 도람통을 두드리면서 나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천길 나락으로 그냥 떨어져 내려가면서 혼이 빠졌는지 온몸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자꾸 땅 굴속 깊이 들어가서 헤매다가는 맏딸 연화가 불러서 눈을 뜨면 어둠과 도람통 소리로 고막이 터질 것 같을 뿐이 였습니다.


 

이렇게 8일이 지나 9일째는 보위부 부부장이란 사람이 와서(이미 안면이 있음) 세면도 시키고 수갑도 느슨하게 해주면서 담당보위부 지도원에게로 보냈습니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함 태걸이가 능청 떨면서 앉았다가 “자기 분수에 맞게 살 줄 알아야지”라고 한마디 하는 것이 였습니다. 나는 말대답을 피했습니다. 담당보위지도원 함 태걸은 유엔에서 지원받은 의약품이 나에게 수만원 되게 공급받은 것이 있는데 그 행처를 몰라서 묻는다면서 “그 숫한 약을 다 팔아 먹었지”라고 하는 것이 였습니다. 쪽배를 뭇느라고 거기에 적잖은 경비가 지불된 것을 알고 묻는 것이였습니다. 그때 유엔에서 지원한 의약품을 나는 다른 진료소보다 더 많이 공급 받았습니다. 수산사업소를 끼고 있는 유리한 점이 있어 의약품 관리소나 군보건과, 지어는 군당 근로단체 지도원까지도 나에게 와서 제사에 쓸 물고기를 가져갔으며 그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항시적으로 철따라 물고기를 공급해 주다 싶이 해서 참으로 서로 돈독한 사이로 지냈댔습니다. 이런 관계로 의약품이 오면 나에게 더 많이 공급해 주었지요. 그 덕에 나는 의약품이 부족한줄 모르고 사용했습니다. 보위지도원 함 태걸이 이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나에게서 받은 의약품이 적지 않았지요. 보위지도원이 나에게서 간첩혐의를 씌워 매장 할 려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니 이제는 의약품 탐오로 나를 법에 걸려고 시도 하는 것이 였습니다. 사실 수많은 의약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일같이 죽는 사람들 생각 때문에 그 약을 함부로 쓰게 되질 않았습니다. 진료소 의사들에게 왕진용으로 그리고 그들이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사업용으로 의약품을 분배하여 사용하였기에 예비 의약품이 항상 풍족하게 있었습니다. 또 경비가 허술한 진료소인지라 어느 때 도난당할지 근심스러워서 그 의약품을 세포비서와 토론하고 우리 집 김장독6개와 윗방 궤속에 감추고 필요 할 때마다 필요한 양만큼 출고해서 사용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보위지도원 함 태걸이는 진료소 약국에 가서 약장에 고가 약은 없고 일반 약만 있으니 그 약을 내가 팔아먹던지 어디 빼돌렸나 싶어 조사를 하는 것이 였습니다.


 

내가 쓴 약 명세와 나의 사인을 가지고 아내에게 가서야 그 숱한 약의 출처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위부는 또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 문제 때문에 보위부 지도원들과 만나는 과정에 그들의 얼굴에 악의가 아닌 선의가 엿보이였습니다. 처음처럼 가혹하고 냉혹하지 않고 어딘가 모르게 동정하는 눈빛이 엿보였습니다.


 

6월25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보위부 부부장이 친히 와서 날 데리고 세면장에 가서 세수도 하게하고 식사도 사과 상자 우에 놓고 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고마움이 되려 의심만 불렀습니다. 또 무슨짓을 할 려나 하고 생각하면서 집에서 보낸 이 급식이 마지막 급식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떠올랐습니다. 아침을 먹자 승용차에 나를 태웠습니다. 이제는 정치범 수용소로 가든지 함흥에 있는 도보위부에 보내는 가부다 했는데 승용차가 신포 쪽으로 기수를 돌리는 것이 였습니다, 옳지 검덕에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더니 날 그곳으로 보내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데 승용차가 군 안전부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였습니다. 정문에 군안전부 호안부부장인 사돈(둘째딸 시아버지)이 나를 보더니 놀라는 것이였습니다.


 

안전부 감방의 계호원들도 놀라면서(홍원군에서는 진료소장 강 유가 안기부 간첩이라고 보위부 지도원들이 인민반에 나가서 선전까지 한 상태여서 모르는 사람이 곧 간첩이라고 할 정도 였습니다. 그런 유명한 간첩이 안전부 감방으로 온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꺼리지요) 신체검사를 마치고 2호 감방 우측 똥통 앞에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이제는 살았다 하는 안도감이 내 뇌리에 스치면서 나는 그대로 꼬꾸라졌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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