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 1부 유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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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의 유년시절
사람마다 꿈이 있다.
박사, 의사, 과학자, 비행사, 가수 등등...
너도 나도 다양한 꿈과 희망을 버팀목 삼아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기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나도 어릴 때 꿈이 있었다. 가수의 꿈.
북한에서 나는 인민학교때부터 소년회관에서 선생님들이 학교마다 뽑으러 오면 올 때마다 발탁되어 성악소조며, 예술체조소조며 무용소조며 화술소조며 손풍금소조 등등 안 뽑힌 소조가 없을 정도로 뽑혀 다녔다. 당시 아빠는 소년회관 관장을 하셨는데 제가 뽑혀오는 날마다 운동장에서 마주치시면 눈을 부릅뜨시고 저를 째려보셔서 담날에는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날라리를 엄청 싫어하셨던 아버지는 자식들을 예술 시키면 본인 성을 갈겠다고 하시면서 엄청 반대를 하셨다. 내가 노래를 너무 좋아해서 설겆이를 하면서도 노래하고 학교 오가면서도 노래하고 입에서 노래가 떠날 줄 몰랐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게 저를 엄청 구박하셨는데도 이에 대한 반항이랄까 어릴 때부터 나는 예술을 무지 좋아했다.
유치원 시절에는 무용반에서 무용을 했었는데 무용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저희 엄마가 말하기를 라디오방송(북한에서 집집마다 설치된 유선으로 된 라디오)에서 노래만 나오면 거기에 맞춰 뱅글뱅글 돌아가며 심지어는 책상에까지 올라가면서 춤을 추었었다고 한다,
유치원이 끝나면 끝나는대로 엄마네 학교로 가서 엄마가 수업하는 동안 학교체육관 선생님(당시 저를 엄청 이뻐해주셨다)한테 가서 사탕을 얻어먹으며 체육관 안에서 체육소조 언니들이 보는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던 생각이 생생하게 난다.
그래서 그 체육선생님께서 저희 엄마에게 꼭 딸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또 엄마가 유치원 갈 때마다 치마를 골라주시면 나는 주름이 없는 핑크색 꽃 치마보다도 춤출 때 이쁘게 동그랗게 펴지는 파란색 주름치마를 입겠다고 떼를 쓰던 기억이 아직도 있다.
인민학교(초등학교) 올라오면서 부터는 노래를 했는데 충성의 노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꼭 우리 학급을 대표해서 독창을 하군 했었다. 아버지 때문에 소년회관 가고 싶어도 못가고 그냥 학교에서 학생간부로 잘 나가고 있던 찰나 고등중학교 4학년 1학기 때에 우연히 구역 설맞이공연때문에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노래를 부르다가 소년회관 선생님들한테 발탁되어서 소년회관에 가게 되었다.
당시 공부실력이 학교 우수생 범위에 있던 저를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놓아주질 않자 소년회관 선생님들은 우리학교 선생님들에게 저를 꼭 가수로 키우겠다는 조건을 내거셨다.
당시 조선인민군 협주단에서 트럼벳트를 부시다가 사고로 이가 한 대 나가는 바람에 우리 구역 소년회관 관현악 선생님으로 배치되어 온 선생님이 너무 너무 극성이셨다.
모든 선택은 저한테 달렸다. 우리 책임지도원 선생님이 또 나를 설득하시기 시작하셨다.
너는 앞으로 우리 학교 사로청조직부위원장을 해야 하며 김일성 청년영예상후보이니 절대로 소년회관 가서 딴따라 하면 안된다고,..(당시 저는 우리학교 소년단위원장직을 하고 있었으며 9월말 사로청에 가맹한지 얼마 안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미 결심히 확고했던 저는 우리 학급 학급반장을 하던 친구를 추천해준 뒤 소년회관으로 향했다.
당시 아빠는 소년회관 관장자리를 그만 두신지 좀 되셨고 이미 다른 곳으로 소환되어 가셔서 아빠 몰래 갈 수 있었다. 후에는 알아차리셨지만 포기를 하셨는지 그 전처럼 못되게 그러시지는 않으셨다.
소년회관에 그렇게 뽑혀간 케이스이니 완전 왕 노릇을 제대로 했다. 소년회관에서는 제가 아코디언을 치고 싶다면 아코디언을 집에 가져가서 연습하게 했고, 하나밖에 없는 피아노도 열쇠를 잠그어 놓고 작곡가선생님과 저만 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김정일이 당시 각 소년회관마다 커다란 천연색 텔레비죤과 오락유희기구를 선물로 보냈는데 오락기구 관리를 저한테 맏기시는 바람에 당시 소년회관에 다니던 친구들이 그거 한번 놀아 볼려고 저한테 잘 보이느라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그때 당시 오락기구가 처음 나오다 보니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모두 회관 수업이 끝났는데도 집에는 안가고 그거 하고 싶어서 줄을 섰었다. (그 후에는 오락기구가 나오다보니 점점 관심이 멀어지긴 했지만)
관현악소조방이 2층이였는데 남자 애들이 오락기구 놀아보고 싶어 2층 벽 창문에 달라붙어 소조실 안쪽을 들여다 보던 생각이 난다.
정말 모든 게 원하는대로만 이루어지던 그 시절 나에게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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