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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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로 이 세상을 살면~(연제7)
이글은 쓰지 않으려고 여러 날 동안 고민하다가 수기를 마감 해야겠고 그리고 탈북자들의 실정을 알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계시기에 이 글을 씁니다.
이 못난 아들 때문에, 이 못난 아들의 생사 여부를 알려고 80고령의 어머님께서 남양까지 오시였다가 두만강 변에서 안전원들에게 붙잡혀 청진 집결소에 끌려가 운명하신 어머님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과 죽으면서도 아빠를 찾으면서 눈도 못 감고 저세상을 간 나의 사랑하는 둘째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이글을 씁니다.
북한으로 돈과 물건을 보낸 지 6개월이 넘었습니다. 이제는 두만강의 얼음도 풀릴 그 무렵에 셋째 딸이 탈북 하여 중국에 왔습니다.
10살 때부터 남포체육학원에 가서 수영선수로 8년, 국방학원에서 권총사격선수로3년, 군사복무4년, 딸이 넷 중에 신체는 제일로 건장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할머니처럼 얼굴에 주름이 가고 시커멓게 냉이 돋고 젖가슴도 없이 키만 썰렁하게 크고 버쩍 여윈 얼굴을 눈뜨고는 마주 볼 수 없었습니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슬피 울면서 눈물속에 전하는 집소식이 내 가슴을 칼로 어이듯 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 안전부에서 나오고 보위부에서도 나오고 초상집 같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어디 갔냐고 년세 드신 어머님보고도 막말을 하고 아내보고도 막말을 하고 딸애들에게는 발길질까지 하면서 반동 놈의 새끼들이라고 고함질렀답니다. 이제는 진짜로 반역자의 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역자의 가족이면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겠으나 아내가 항일투사 유자녀여서 중앙당 유자녀 과에서 담당하고 있기에 감히 정치범 수용소로 보낼 엄두를 못 냈는지, 촌에 추방을 하면 오막살이 집이라도 있지만 시가지에선 어디 몸 둘데가 없었습니다. 반역자 가족이니 형제들도 외면하는데 남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도 다정했던 분들은 여기저기서 동정해주고 도와주고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여주었습니다.
홍원 읍에는 남산 공원이 있습니다. 그 공원에 전쟁을 대비해서 땅굴을 파 놓은게 있었는데 온 가족이 거기서 살았습니다. 맏사위는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가족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반역자의 처가 때문에 아니면 살길이 콱 막혀 앞길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그처럼 충성스럽고 다정다감하던 사위가, 아들 없는 집에 아들 구실한다고 처가에 열성이던, 그리고 나도 아들처럼 사랑했던 사위가 종적을 감췄습니다.
어머님은 막내 동생이 모셔가고 땅굴에는 아내와 맏딸 외손녀와 쌍둥이 손자 그리고 셋째 딸이 살았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밭과 논으로 나가서 쥐구멍을 파서 낟알을 얻기도 하고 수 십리나 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그걸 팔아서 여섯 식구가 살아갔습니다. 엎친데 덥친다고 그해 겨울은 모질게도 추웠습니다. 동굴 속에서 얘들을 죽일 것 같아 쌍둥이 손자 중 동생을 고마운 분이 자식처럼 기르겠다고 간청하여 주었습니다. 자식을 남에게 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는 여러분들에게 맡깁니다. 이제는 가족 모두가 북한 사회주의 제도는 생사람을 잡아먹는 나쁜 제도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이 자식이고 가족인데 자기들의 아버지나 남편이 안기부 간첩이 아닌 것이 불보듯 뻔한 사실인데도 없는 죄를 덮씌워서 죽이려 하니깐 몸을 피했는데 그걸 반역자로 몰아 그 가족까지 죽게 만드는 정부가 좋은 정부가 아님을 현실을 통하여 너무나 피맺히게 실감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둘째 딸은 출산하고 3일 만에 결핵성 뇌막염에 걸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이 못난 아빠만 찾다가 눈도 감지 못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한창 젊음을 뽐내면서 살 28살을 일기로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의술을 자기가 대를 잇겠다면서 의학공부에 열심 하던 딸이 였습니다. 노래 잘 부르고 기타 연주는 물론 일도 잘하여 체신소에서 보배덩이로 떠받들리던 딸이 였습니다. 출가해서는 시부모님께 효도하여 시아버지는 며느리라고 부르지 않고 내 딸, 우리딸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해 주었습니다.
내 동생 셋과 둘째제수님, 조카들 5명이 굶어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 가슴에 한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이제는 내 딸마저 북한 제도 때문에, 사회주의 때문에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 때문에 죽었습니다.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고 하늘에 대고 빌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였습니다. 아내와 딸 둘이 악착같이 일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하면서 셋째 딸을 중국으로 탈북 시켰습니다. 아버지에게로 가야 우리들은 살 수 있다 이것이 아내와 나의 딸들의 생각이 였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간 모였던 돈과 물건들을 인편을 통해 북한에 내 보냈습니다. 10분의 1이라도 내 가족에게 갈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 돈으로 하루빨리 탈북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물건과 돈은 정확하게 가족에게 도착했지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금액이 였습니다. 그래도 그 돈을 받고 이제나 들어올까 기달려 지는 가족들이 였습니다. 이렇게 한해를 근심과 걱정, 불안과 기달림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래도 두 딸이 내 가까이에 있어 얼마나 마음이 위로되던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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