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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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로 이 세상을 살면~~~(연제6)
나는 정신적인 압박감과 육체적인 피로에서 풀리면서 자리에 쓰러져 10여일을 앓았습니다.
차차 병세가 호전되어 밥도 조금씩 먹게 되니 교회가 뭐하는 곳인지 그게 엄청 궁굼 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교회를 반동적인 단체로 취급하면서 중국으로 탈북 하였다가 북송 되여도 교회에 있었냐가 첫 번째 심문일 정도로 북한은 교회 탄압에 촉수를 뻗쳤습니다.
일생을 공산치하에서 외곡 되고 편파적인 교육과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중국에서 태여 나서 중국에서 공부하고 중국에서 20여년을 살아온 사람이지만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기 전인 1974년에 북한으로 나갔기에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하여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느 탈북자들과 다른 점은 중국어를 알고 중국태생이여서 공안의 검열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개혁개방으로 변화 되었다 해도 빨리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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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우리 탈북자들의 피난처 였습니다. 나도 남들이 하듯이 성경을 무조건 자꾸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공산당 선언에 기재된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으며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10대원칙도 성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부친 김 형직도 신학교 출신이며 모친은 이름 자체가 강 반석으로 성경에서 취한 것이 였는 데 왜서 기독교를 그렇게 비방 중상하고 기독교인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정치적으로 탄압하는지 그 이유를 예전에는 몰랐지만 성경을 보면서 그 베일이 벗겨지였습니다.
교회에서는 4개월이 지나자 기도원으로 나를 보냈습니다. 교회에서 약20리 떨어져 있는 외딴 곳이고 수시로 한국에서 목사님들과 전도사 혹은 집사님들이 전도차로 오는 곳이 여서 교회에서는 몹시 중요시 하는 곳이기도 하였고 또 기도원에는 건물이 4채나 되고 땅도 5백평 정도 되었고 과수원도 3백평 남짓하게 있었습니다.
나는 일할 수 있는 곳이 생기여서 아무런 불평도 없이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새벽4시에 깨여나서 기도원에서 약30분간 기도하고는 기도원 주변을 정리하는데 전념하면서 기도원 마당에는 꽃밭도 만들고 집주위에 오이, 호박, 마늘, 고추, 파, 무, 배추, 참외와 수박, 토마토, 가지 등 없는 채소 없이 골고루 다 심었습니다.
머릿속 잡념을 없애느라 조그마한 틈도 없이 일에만 집착했습니다. 지난해에 왔던 목사님들은 기도원이 새롭게 변했다고 나를 무척 칭찬해주면서 김영철 전도사 몰래 많은 돈을 주고 갔습니다.
교회는 우리 탈북자들이 잠시 몸을 피해 있을 곳이지 영주할 곳은 아니 였습니다. 언제 어느 때 중국공안에 잡힐지 예측할 수 없는 곳이 였습니다.
머슴보다 못한 인생, 노예와 같은 인생이 바로 중국으로 탈북한 탈북자들의 처지 였습니다. 머슴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일을 시킨 후에는 품 삵이라도 주지만 탈북자는 일을 시키고는 돈을 달란다고 공안에 고발해서 엄동설한에 잠옷 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북송 되었습니다.
특히 여자들 경우에는 이사람 저 사람에게 팔려 다니고 낮에는 식당에서 접대부로 일을 시키고는 저녁에는 저녁대로 성 봉사를 시키면서도 탈북자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지구 땅 어느 곳에 이런 현상이 또 있겠으며 어느 나라 역사에 이런 사연이 기재 되여 있었던가...
나도 중국에서 태여 나서 중국에서 자랐다하여, 그리고 중국말을 잘하고 중국 글도 잘 쓴다 하여도 누군가가 고발하면 잡히게 되였고 잡혀 북송하면 그대로 처형당하던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국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이 주는 돈을 모아 중국 국적부터 해결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중국 국적이 있어야 중의학원에 가서 검정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그냥 머물러서는 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가족을 하루빨리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나도 정당하게 하나님께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바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7월 중순이 였습니다. 김영철 전도사가 급히 기도원에 와서 빨리 짐을 싸가지고 상지 시 마연에 있는 교회로 가라는 것이 였습니다. 사연인즉 한국 목사님이 교회에 와서 설교하다가 중국동포교인이 포상금을 노리고 공안에 고발하여 한국목사님이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탈북자도 있다고 고발 되어서 빨리 피신하라는 것이 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간 정들었던 교인들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리고 탈북자인 학용이와 용주와도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흑룡강성 상지 시에 있는 마연교회에로 피신했습니다.
마연교회는 권사님 집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마연교회에1개월 남짓이 있는 동안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홍원에서 온 나의 셋째 딸 친구 임순이를 만났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나는 내 딸을 만난 것처럼 너무 기뻣 습니다. 임순이도 내가 이렇게 가족을 두고 홀로 탈북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면서 부모만난 듯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임순이는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두아들을 둔 어머니이며 지금은 대학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그의 집을 방문하였고 지금은 전화로 자주 통화도 한답니다) 두고 온 가족들 이야기로 눈물바다를 이루면서 기약도 없는 만남을 기원하였습니다.
교회 가족들의 가을 추수를 끝내고 나는 지체 없이 할빈으로 떠났습니다. 할빈에 가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중의원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것이 하루빨리 불안 속에서 해방되는 길이고 내가 갖고 있는 의술로 돈을 벌어야 빨리 돈을 모을 수 있고 빨리 돈을 모아야 가족이 중국으로 빨리 올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빈에서는 탈북자인 김복순 여사네 집에 거처를 정하고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개사육장 관리원, 방수공장 창고 장, 보일러 배관공장 노동자 등 닥치는 대로 일 했습니다.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순 악으로 일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여 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악착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니 이 세상을 살기가 그만큼 편하였습니다. 지인들의 방조 속에서 2001년1월에는 중국 국적을 마련했고 2월에는 할빈 중의 학원 검정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중의 학원 검정고시에 통과하자 목단강 민족병원에서 취직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2001년2월 중순에 목단강 민족병원에 중의사로 정식 취직하여 환자치료비에서 침 치료비 중 3할은 병원 측이 7할은 내가 수익 하고 한약 처방은 병원 측이 6할을 가지고 내가 4할을 수익하게 계약을 맺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4개월을 모으니 인민 페 5천원이 되었습니다. 이 돈이 고스란히 북으로 나가면 우리 집 식구는 몇 년을 잘 살 수 있을 것인데 사람을 시켜 북한에 보내려면 세관에서 떼이고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떼이고 받아 가지고 가면서 떼이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 물건이 집에 도착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집에 도착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싶어 탈북자들은 사지 속에서 눈물과 피로써 번 돈을 북으로 가정을 살리려고 보내는 것이 였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돈이라도 보내고 나니 태산을 지고 있다 내려놓은 심정이 였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못 먹는 술이지만 독한 빼주를 마시면서 어머님 생각, 아내생각, 쌍둥이를 낳아 고생이 겹친 맏딸 생각, 그리고 내 살점처럼 귀엽던 손녀 생각, 내 때문에 군에서 강제 제대된 셋째 딸 생각으로 눈물로 볼을 적시였습니다.
탈북해서 1년8개월 만에 있은 일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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