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 탈북수기

본문 바로가기

탈북수기

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본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죽음의 언덕에서 (연제5)

 

연길 시교에 있는 처제네 집에서 생활한지도 2개월이 넘었습니다. 하루 빨리 건강이 회복 되여야 무슨 일이라도 하겠는데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건강이 좀처럼 회복되질 않았습니다.

 

처제네 부부사의의 말다툼은 이제는 도를 넘어 싸움으로 번지였고 내가 있건 말건 꺼릴 낌이 없었습니다. 탈북자를 숨겨두었다가 탄로가 나면 빠콴(벌금)하는데 무슨 돈이 있어 벌금을 내며 처 형 때문에 왜 우리가 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싸움의 주요의제 였습니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나 때문에 일 년 수입 모두를, 그것도 모자라서 농기계까지 팔아야 한다니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탓할 것도 못되고 오직 나의 운명은 내가 책임지고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떠나기로 결심 했습니다. 막내딸을 연변 총각과 혼사를 정하고는 그길로 떠났습니다. 어디라는 목표도 없이 연길시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처제네 부부는 새해를 앞두고 떠나는 나를 만류하지도 않았습니다. 훌렁한 나의 배낭에 처제가 눈에 눈물이 가득해서 누렁지를 길양식으로 넣어 주었습니다.

 

이제 7일만 지나면 새해 2천년이 됩니다.

기차역 대합실은 썰렁했습니다. 구석진 곳에 않아서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동북 3성에서는 흑룡강성이 제일 살기가 좋고 사람인심이 그중 좋았습니다. 흑룡강성 계서 쪽에는 탄광들도 많아 일감도 많을 걸 짐작하고 목단강행 기차표를 구입하려니 오늘은 없고 내일 아침 기차가 있었습니다.

 

무료하게 의자에 앉았는데 머리에 빨간 수건을 쓴 여성이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이 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 모습이 탈북여성 같았습니다. 얼굴에 상처 자국도 있고 멍 든 것이 보기가 민망스러웠습니다. 이때 한 젊은 여성이 그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옆에 앉았습니다. 두 여인이 귀속 말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붉은색 수건의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목 메여 이야기했고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도 눈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두 여자 모두 탈북 여성이 였습니다. 탈북자란 거기에 서로의 마음을 터뜨리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 무람없이 형성되는 것이 였습니다.

 

그녀가(붉은 수건의 여자) 무산에서 로과 쪽으로 두만강을 건넜는데 건너자마자 강변에 숨어있던 중국 조선족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조선족이 그녀를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짐승처럼 성욕을 채우고 나서는 한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한족은 그녀를 데려다가 머리에 주머니 같은걸 씌우고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그 짓만 하는 것이 였습니다. 이 한족 놈 팽이는 탈북 여를 사온 값을 벌충한다고 동네 사람들 상대로 성매매를 하였습니다. 여자는 넘 억울하고 분하여 죽으려고 하여도 죽을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녀는 생지옥에서 6개월을 지나고 경계가 풀린 틈을 타서 악마의 발톱에서 탈출하기에 성공하여 산속에서 3일을 헤매다가 기적 소리를 듣고 역에 찾아와서 기차에 올라 승무 공안을 찾아 자기가 탈북자인데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눈물도 없이 말했습니다. 한족인 승무 공안원이 조선족 여성에게서 그녀의 사연을 다 듣더니 그 조선족 여인에게 그녀를 맡기고 잠시 어데로 갔다가 손에 여러 가지 빵과 과자, 그리고 음료를 주고 갔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갖고 있는 돈을 길에서 보태서 쓰라고 적지 않은 돈을 모금하여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의 말을 통역하던 여성이 연길 역에 내리면서 그녀를 데리고 연길 시에 있는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교회에 맘을 붙이지 못한 그녀는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어제저녁에 기차역으로 나오다가 세 명되는 깡패 놈들 만나 윤간을 당하고 가슴에 품었던 돈까지 몽땅 그놈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의 얼굴의 상처는 그래서 생긴 것이 였습니다.

 

그의 하소연을 곁에서 듣는 나는 인간세상이 이렇게 악착하고 무지렁이 되어 가는데 치가 떨렸습니다. 나는 나의 딸들의 운명이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내 딸들에게도 저런 운명이 오지 말란 법 없지 않는가...

 

두 여인이 머리를 맞대고 울며 이야기하며 하다가 함께 손잡고 역 밖으로 나갔습니다.


흑룡강성 계서 시에 도착한 나는 밤에는 기차역에서 자고 낮이면 일자리를 찾아 계서시내를 다녔습니다. 일감은 자동차에 석탄을 싣고 부리는 상하차공이였는데 나의 얼굴을 보고는 일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이 였습니다. 광대뼈가 앙상하고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가늠 못하는 사람에게 일을 시켰다가 되려 부담이 될까싶어 찾아 가는 곳마다 일시키기를 거절 하였습니다. 저녁이면 지친 몸으로 역전대합실에 와서 뜨거운 물에 누렁지를 불쿼 먹고는 그냥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잤습니다.

 

길양식인 누렁지도 다 떨어지고 호주머니엔 단돈 1전도 없이 되었습니다.

 

거리에서는 2000년 새해를 맞는다고 하늘이 떠나가게 축포를 쏘아올리고 사람들로 시글법적 거리는데 나는 역전 창문가에 서서 아무런 묵념도 없이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지난날 내가 살아왔던 전 생애가 주마등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갔습니다.

 

2000년1월1일 나는 역전에 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으면 죽고 가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어서 조선족들이 많이 산다는 계동 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서산에 해도 넘어가고 불 밝은 계동시가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선 길목에 앉아 걸어갈 힘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오란데도 없는 내 신세, 굶어 죽던지 얼어 죽던지 두 길만 남은 내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이제는 죽을 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나는 호주머니에서 수면제 통을 꺼내 들었습니다.수면 제를 먹고 어느 나무 밑이나 풀숲에 누워버리면 이 세상에서는 원한만을 뼈에 사무치게 갖고 가서 이승에서 할 수만 있다면 원쑤 갚을 생각뿐이 였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어둠이 짛게 드리운 속에 적십자 불빛이 나에게로 확 안겨왔습니다. 나는 적십자로 찾아가면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눈길을 헤치면서 그곳으로 찾아 갔습니다. 그곳에 당도하여 사람을 찾는데 중년되는 여인이(김 보금 집사)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였습니다.

“전도사님께서 지금 안계시는데요..”

나는 전도사란 말에 놀라서 적십자 등를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가로보다 세로가 더긴 십자가였지요. 나는 주저 않고만 싶었습니다. 나의 거동을 지켜보던 여인이 문을 열고 간곡하게 집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조금 있다 전도사(김영철 전도사)님이 왔습니다. 두 분의 훈훈한 접대에 나는 탈북자임을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김영철 전도사님은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자기들 교회에 탈북자 청년이 2명 있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탈북청년 학용(지금 서울에서 공직자로 근무중), 용주(여러 차레 북송 되였다가 탈북해서 지금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아직 만나보지는 못하였음. 학용씨와 용주에게 본인의 이름을 이렇게 밝히는것을 알리지 못하고 여기에 기재하는걸 이해바랍니다. 사실 그대로 옴기려 하니깐 이렇게 되였음을 양해바랍니다)와 인사를 나누고 1월3일 우리들만 독립가옥을 세 맡고 분가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의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받았습니다.(계속)

0
로그인 후 추천 또는 비추천하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25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1 건 - 1 페이지
번호
제목
글쓴이
게시판 전체검색
상담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