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강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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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
내가 북한 보위로부터 대한민국의 안기부 간첩이란 모함을 쓰고 보위부에 연행 되여 지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지 꼭 10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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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 육체에 남긴 상처는 허물이라도 남았지만 가슴에 난 상처는 세월이 갈수록 아물지도 않고 그냥 나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억울함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한 조작과 거짓으로 한인간과 그 가족을 처참하게 매장하려한데 대해서는 지금만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눈을 감는 그 때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홍원군은 식량 한 알 노임 1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시기에 우리 7남매 중 둘째 동생네 5가구 중 조카 철호만 살아남고 4명이 굶어 죽었으며, 셋째동생네5가구 중 셋째동생과 조카1명이 굻어 죽었고 다섯째 남동생이 굶어 죽었습니다.
내가 진료소장으로 있는 구역에서는 매일과 같이 아사자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있다가는 우리 가정만 아니라 진료소 성원들까지도 아사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나는 더는 그대로 있을 수 없어서 안해와 함께 함북 남양에 가서 중국에 있는 처가와 외가 집에 매일과 같이 편지를 하면서 “왜가리” 생활을 1개월 넘게 하여 외가 집의 방조로 중국 인민 페 3천원을 받았습니다. 그 중국 돈 3천원이 북한 돈 8만원이 되었지요.
우리부부는 그 돈을 가지고 일부는 장사밑천으로 쓰고 일부는 진료소 명의로 가자미 낙시 배를 뭇는데 이용했습니다. 당시 개인은 쪽배를 가질 수 없지만 기업소 명의로 낙시 배나 미역 등 해초작업을 할 수 있는 쪽배를 허용하였습니다. 나는 쪽배8척을 뭇고 한배에 낙시꾼 4명씩 승선시키고 승선하면 1인당 50원씩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걸로 진료소 성원들과 우리 가족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요.
이런 계획과 사업은 초급 당에 보고되었고 초급당비서의 비준과 지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나와는 안면도 두텁고 개인거래도 밀접했던 우리구역 담당보위 지도원인 함 태걸이가 자기에게 고이지 않고 멋대로 판을 벌린다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사자가 속출하자 이것은 일군들의 영도무능력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내가 말한 것이 죄가 되어 홍원군보위부에 영장도 없이 연행 되었습니다.
1998년6월15일 오후 2시.
보위부에 긴급으로 중국어를 번역할 것이 있다고 낮모를 보위지도원이 나를 찾아 집에 왔었습니다. 금방 오침하고 오후 초급 당 총회에 갈려고 하는데 보위지도원이 왔기에 먼저 보위부부터 들렀다가 회의에는 갈려고 보위부에 갔습니다.
부장실에 들어가니 새로웠다는 보위부장과 도보위부 반탐 과에서 왔다는 사람이 엄엄한 낮으로 나를 보는데 그 눈길에 살기가 있어 이상한 느낌이 였습니다.
보위부장 왈~이곳이 어딘지 알지~~
강 유왈~~보위부인데요.
보위 부장 왈~보위부는 살아서 들어와서 죽어서도 못 나가는 덴 줄 알지~~
강 유~~~~~~
보위부장 왈~~그동안 간첩임무를 받고 활동한 걸 제대로 털어놔, 그럼 살 수 있어~~
강 유왈~뭐~어 간첩.
나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억이 막혔지요. 간첩이란 말은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간첩이란 형법상 실형 대상이며 그 사회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요. 특히 북한에서 간첩이라 함은 총살형입니다.
나는 내 앞에 시련이 닥쳐왔음을 직감했습니다. 처음엔 마음에 두려움도 생기고 떨렸지만 보위부가 나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처단하려 작정하는데 그대로 죽었소 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약한 자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정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도 불사 하는 것임을 나는 그때 깨달았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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