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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

감사라는말이 나오기까지의 인생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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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오늘 이렇게 자유민주주의 진정함의 진실의 깨달음을 받고 날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나의 가슴속에 가득차 있을때 이모든것을 저같은 사람을 포옹하시고 자유민주주의 시장 생활속에서 사회적응과 정착을 잘하도록 이끌어주신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인간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게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의 가슴속에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까지의 저의 인생 행로의 과거를 말하려고합니다.

    저는 올해50살. 주위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상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나는 두명의 장성한 아들이 있는가하면 혹은 하나도없다

  그것은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자이기때문이다

  나는 1957년 4월21일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리에서 태여나서 1988년 5월에 러시아 하바롭스끼 벌목장에서 한줌도 못되는 북한위정자들의 이속을 채워주기 위해 외화벌이에 나서기까지 나는 북한의 습관과 문화.체제에 따라 성장하였고 만10년의 병역의무와 결혼 그리고 두아들을 둔 가정의 가장으로서 보통사람으로 조용히살던 사람이다 .

그러나 나는 북한에서 너도나도 선망하는 러시아벌목장에서 나의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제공하리라고는 단 한번도 짐작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영하40도의 매운 추위의 날씨와 고된일의 연속인  벌목장에서 생활하면서  88올림픽이후 급속히 해외로 뻗어나간 남조선의 존재를 듣게되였고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페세된 북한사회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세계의 정세와 자본주의 경제활동에도 조금씩 눈을 뜨게되였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남조선사회에 대하여 동정하고 남조선상품을(치약.비누)소지하여다는 이유로 죄아닌 죄인으로 취급되여 1992년 3월에 북한의 두명의 기관요원에게 두다리와 손에 수갑을 채우고 북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과연 나의 모험은 어디에서 시작되여을까?

나의 인생을 건 모험을 향한 힘은 마침내 시속 90킬로메터로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 유리창을 저의손에 채워져있던 수갑으로 깨부스고 탈출하기위해 러시아의 차가운 눈밭으로 몸을 날렸다 .

죽기를 각오하면 살수있다는 말은 틀림이 아니다.

뛰여 내릴때에 다친 다리의 통증과 아픔을 참고 숲으로 강으로 4시간동안 달리다가 나의 힘에 한계에 달하여 기진맥진하여 않아 있는 순간 내가 살면 조국에 있는 가족들이 반역자로 락인 찍혀 온갖고생을 한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애 사로잡혀 있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러시아의 민가에 들어가게 되여 도움을 요청하게 되였다

더욱이 내가 찾아간 집주인은 북한벌목장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 이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15일간 나의 상처받은 다리를 치료받고 완괘될무렵 북한에서 침략의 앞잡이라고 통했던 남조선의 선교사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나와 같은말로 통하는 남조선사람이였다

그는 나를  형제님라고 불러주시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이 모든 어려운 난관을 이겨낼수 있다고 말씀 하시면서 성경책을 주시였다

외국에서 처음으로 접한 한글로 된 책자를 보고 이틀동안 읽어 본 소감에 의하면 성경책 이라고 말하기보다 북한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보아던 김일성의 혁명활동략력을 베끼운 것이라고 선교사님한테 말하여는데 선교사님을 말없이 웃던 모습이 떠올라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그것은 지금 생각하여보면 북한에서 살아있는 신이라고 자처하고 세놰 교육을 시키고 있는 김부자의 사상교육자체가 성경책을 보고 하여다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사회에서 강직된 단어로 듣던 동무 동지라는 칭호대신에 듣기 좋은 형제님이라는 단어를 내생애에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그러나 이분과 같이 있다는 자체가 국가반역죄로 몰리여 조국에 있는 가족들이 엄청나게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 할때 가슴이 터지고 미여지는 것 같아서 자수하면 용서 할것이라는 허무한 생각으로 망연자실한 상태인 저에게 한국으로 갈것을 요청 하여지만 저는 그마저도 선뜻 결심 하지 못하였다.

다시 한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나서기 까지 수백번을 생각한 끝에 모스크바행 열차에 올라지만 다시 조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슬픈 마음을 독한술로 달래이면서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마음을 졸이면서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갈것을 요청하여는데 택시기사분은 한국대사관으로 간것이 아니라 인공기가 펄펄 날리는 모스크바 북한대사관 정문앞에다 내리여 놓아서 저는 그 자리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시장을 찾아서 한국 유학생을 만나서 한국대사관위치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여 무사히 한국대사관으로 가게 되었다.  

길고도 위험한 순간들을 대가로 요구한 대한민국으로의 여정을 2년을 훌쩍 넘어 1994년 8월에야 실현 되게 되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탈북 벌목공7명의 합동 귀국은 언론의 대서특필로 보도 되였고 나는 자유를 찾은 기쁨으로 웃게 되어지만 한편으로 조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다시 1년여 동안 교육과 산업시찰 등의 체제 적응기간에 알맞은 교육을 받은 뒤 1995년 7월에 대기업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사회생활과 회사생활의 시작으로 자유민주주의 세상의  새로운 삶을 시작 하기 보다 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이 세상을 보아기 때문에 물질만능의 허황된 꿈으로 시작하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것은 모든 문제를 돈으로만 해결되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풀릴수 있다는 허황된 망상으로 황금 망상주의에 빠져서 빨리 더 빨리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이 사회의 생활이 순탄지만 않았다.

다시 말한다면 이북체제에서 골수에 박히도록 공부한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돈이면 이세상 모두를 해결한다는 황금만능의 허황된 꿈으로 시작한 자유민주주의 시장체제의생활이 나한테는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 하여으면 돈만 따라다니는 나를 가만두지 않아고 여기저기로  조롱하면서 괴롭히고 고생만 시키였다.

돈의 유혹에 끌려 다니는 나의 몸을 가만히 나두지 않고 이사회는 망가뜨리고 이 세상 누구라도 쉽게 가질수 있는 불평불만을 안겨 주었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쉽게 얻으려는 유혹에 방황하는  나에게는 허황된 망상과 허영심만 가득차 있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얻는것도 가진것도 없었다.

오직 나의 생각대로 남은것은 체제 적응기간 교육 중 취득한 용접3급기능사의 자격증이 나의 밑천이 였고 함께 과정을 수료했던 18명의 탈북자들이 나의 유일한 인적 자산 이였다.

이런 허황된 꿈을 안고 시작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라고 말할수 있는 처음 희망을 안고 시작한 회사생활에서의 생활은 나의 기대와 크게어굿났다 .

그것은 1995년 07월 19일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나의 생각은 사무실에서 남들처럼 양복차림에다 넥타이를 매고 근무 하는줄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지만 나의 생각대로 되지 못하고 현장으로 가게 되면서 저는 너무나 엄청나게 실망 하였다.

그것은 북한에서 보고 또 보아도 실물이 나고 지겨운 건설현장에서 일하게 되어는데 한마디로 막노동으로 이 사회의 첫발자국을 내딛게 되어는데 돈에 환장한 나의 생각대로 하는일마다 제대로 하는것이 없었고 항상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서 일하면 생활하니 이 세상을 제대로 볼수가 없어고 방황하면서 생활하는 나의 몸뚱아리를 페인으로 만들어 버리였다

이렇게 실망하면서 현장에서 일하는 나의모습과 마음은 더욱 더 이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마음을 가진 나에게는  맡은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고 않으나 서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돈 돈 돈 하면서 허황된 꿈만 키워 나갔다.

이런 생각과 몸가짐을 가진 나에게는 서울시내 주상복합 건설현장에서 막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은 업무를 맡은것이 바로 안전관리 보조라는것이 나의 공식 역활이었지만 실상은 현장의 이모저모 궂은일은 나의 차례였다

정말 너무나 힘들고 힘들었다

집에서 현장까지 제시간에 출근하려면 첫 전철을 타게 되어는데 새벽4시반에 일어나서 아침도 못먹고 출근하자니 너무나 외로워고 힘들어지만 주위에 있던 분들이 아침을 회사에서 먹게 도와주고 주말이면 항상 저와 함께 친근한 이웃으로 형제처럼 지내면서 저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주시였다 

주위에서 저를 진심으로 도와주어지만 정말 외롭웁고 힘들었다

그것은 30년여년 살던 나의 삶을 지배하던 방식을 버리고 다른삶을 산다는것이 생각만큼 녹녹치않는 큰 변화임이 분명했고 느끼게 되였다

이런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낯설은 이땅에서 불평불만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어지만 결국 남은것은 나를 페인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생각의 반발심으로 아니 누구보다 단 시간내에 많은 돈을 벌게다는 마음으로  나의 전 재산이라고 생각한 자격증을 써먹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택한것이 바로 용접을 하는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사에서 운영하는 철골을 조립하는 공장으로 가서 일하게 되어는데 나의 생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고 말할수 있어지만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였다

겨울에는 살을 에이는 매서운 바람과 철판에 손을 갖다 대면 얼어붙는 날씨였고 여름에는 땀으로 미역을 감다싶이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일하는데 온갖 정신을 쏟아부어지만 일이 나의 마음에 성이 안차게 되었다

그것은 잠시 잠깐 혼자 있게 되면 집생각을 하게 되어고 어떻게 하면 단시간내에 많은 돈을 벌게다는 온갖 잡생각을 하게 되어는데 그러한 생각을 잊을려고 낮에도 일하고 연장근무를 하면서 심신의 외로움과 잡생각을 피곤함으로 이겨나가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나의 회사생활은 이세상의 모든 불평불만과 외로움과 잡생각을  이겨내는데는 그어떤 보약이나 남의 동정을 받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이 정신을 차리고 할수 있는것이야말로 아주 고되고 힘든 일만이 고칠수 있다는 신념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세상은 나를 가만두지 않아으면 같이 교육을 받고 나온 같은 탈북자들이 나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인신모욕 같은 말로 날 조롱하여는데 여름에는 땀범벅이 되어 휴식을 할 때 저보고 자기는 사무실에서 에어컨 바람 때문에 너무 추워서 옷을 두껍게 입고 있는데 넌 한국에 온 탈북자 망신을 시키는라고 선택한것이 용접이냐고 비아냥 거리여지만 저는 누가 알아주건 말건 주위에서 보던 말던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고 또 하여으면 일이 힘들면 달리는 열차에서 뛰여 내리던 마음으로 이세상 모든 고생을 극복 할수 있다는생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여 나갔다

또한 이러한 힘들고 고된일과 외로움을 이겨나가고 열심히 생활하게 한것은 공장장님과 관리부장님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있어기 때문이지 절대로 나 혼자힘으로 하지도 생각지도 못하여을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관리부장님은 힘든 일을 각오하고 더욱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과 가정을 꾸려야 이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것이라면서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여직원과 가정을 맺어주었고 신앙생활을 잘 할수있는 교회까지 선택하여 주어습니다

그리고 공장장님은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하루일이 끝나면 사무실에서 같이 이 사회에서 필요한 체계적인 업무지식과 컴퓨터를 배워주시였고 설계 시공 안전에 대한 업무를 배워 주신 덕분에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과 가스안전관리자 자격증을 취득하게 하는 영광을 주시였다

하지만 열심히 적응한다고 하는 이면에는 여러 가지 부조화와 갈등이 언제나 함께 따라다니면서 떨어지지 않고 나를 괴롭히고 방황하게 만들어 버리려고 악착같이 붙어 다니면서 날 다시 방황하게 하였다

그것은 1996년 11월에 사내 결혼한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신혼이라는 말이 무색 할 정도로서로의 생각차이를 확인 시켜 주어는데 너무나 짧은 시간에 만나서 교제 하다 보니 모르는것이 많아고 더욱이 집에서 남자가 최고의 대우를 받는 북한식 사고방식은 통하지도 않아고  이로 인하여 집에서는 매일같이 가정불화로 심신을 괴롭히여 한마디로 신혼생활은 불화의 늪이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러한 가정생활이 순탄지 않으니 나에게는 마약이라고 말할수 있는 불평불만이 다시 찾아왔지만 이 모든 것을 술과 춤추는데로 돌리여 마음의 외로움을 달래 보려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돈이 필요 하여지만 집사람한테 받은 한달 용돈 30만원을 하루저녁에 먹고 마시는데 소비하니 한푼도 없었다

또한 나 자신의 가정생활의 고초를 알아주고 위로해주는 벗도 없어고 같이 넘어온 다른 탈북자분들의 일보다 멋지지 않고 고되고 힘든 일이여으니 이런 모순을 타파할 돌파구가 필요하여는데 가능하면 빨리 한꺼번에 해결 할수 있는 강력한것이 필요 하였다

그것이 바로 신용카트라는 점이 정말 아이러니인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최고 히트작이자 최고의 악인 신용카트를 발견하고 만세 삼창을 부르면서 열심히 쓰고 또 사용하다보니 그만 신용카드에 중독이 되어 필요하면 굿고 필요하면 돌리면 필요하면 막는 생활에 빠져들어 이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흥청망청 사용하다보니 끝없이 계속될 둣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애인이자 친구인 신용카드와의 관계는 5천만원의 부채에 달하자 언제 그런적이 있어는냐 하둣이 싸늘하게 종지부를 찍었고 결별하게 되었다

이런 불규칙적인 생활과 자유분방한 나의 생활의 뒤에는 아주 혹독한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녀지만 그것을 모르고 흥청망청 살아온 나에게는 신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어고 나의 급여에도 손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날 도와줄 사람도 동정할 사람도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방황 하다가 나중에는 자살 할려고 결심 하여지만 그마저도 이 세상이 허용하지 않아는데 그것은 러시아벌목장에서 죄아닌 죄로 잡히여 북한으로 호송되던 그 모습과 달리는 열차에서 뛰여 내리던 모습이 생각나면서 오히려 더욱 강하게 아니 이 세상에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각오가 생기게 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한것이 신혼이라는 말이 무색하고 사랑이 굳기름처럼  식어버린 나의 아내에게 다가서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고리타분한 북한식 사고방식인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쓸모 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나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여자 앞에 무릅을 꿇고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말하고 도움을 요청 하였다

가정생활에 무관심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진 나와는 절대로 같이 살수 없다고 결심한 나의아내에게 붙는 불에 키질을 한것 같이 더욱 큰 화근으로 될것이라는 생각에 용서해달라고 한시간동안 무릅을 꿇고 기다려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참 후에 저의아내가 나한데 모두가 자기 잘못으로 이렇게 되어 으니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면 모든 빛을 갚아 주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람과의 약속대로 신앙생활을 하게되어는데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는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억지로 가게 되어는데 하나님을 믿는다 것보다 나의 카트빛을 갚아주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만 않으면 졸다가 오는 아주 불성실한 신앙생활을 한달간 다니여더니 점점 설교의 말씀이 나의 귀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때까지 불평불만으로 생활하여온 이 세상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니 너무나 마음이 편해 지였다

이날 이때까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모든 사회생활이 내 생각대로 되는줄로만 하여온 오만 방자한 생각이 이처럼 커다란 위험이 온다는 것과 함께처음으로 구원의 의미를 알게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그것은 가정의 불화의 중요한 원인이 나한테 있다는것을 알게 되여는데 이 세상을 살면서 감사할줄 모르고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면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열심히 하여더니 정말 너무나 놀라운 일이 현실처럼 다가오는데 그것은 평생 용접이나 하다가 회사생활을 마치려고 생각하고 일하여는데 용접을 시작한지 7년이 지나던 해에 본사 발령을 받고 본사로 출근하게 하는 영광을 주시였다

그러나 본사로 출근하면서 첫날부터 나한테 업무를 주지 않고 서류정리를 하라고 하면서 책상도 차례지지 않았서 남들의 책상옆에서 서류정돈을 하는데 6개월이나 하면서 짜증나고 불편하여지만 저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여더니 6개월이 지나서 책상이 차례지여는데 전화기와 컴퓨터를 주지 않고 계속 서류정리를 시키는 것이 였다

짜증나고 불편 하여지만 저는 끈질긴 인내심으로 남들이 하는 업무를 주의깊게 배워나가면서 맡은 업무를 열심히 하여더니 1년만에 전화기와 컴퓨터를 주고 여직원의 사무보조를 하는 일을 맡겨 주어는데 더욱 열심히 하기위하여 아침 8시출근이지만 남들보다 두시간 먼저 출근하여야 빨리 배울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면서 아침 6시 출근으로 계획을 세우고 사무실업무를 하나하나 차근히 배워나갔다

이라하여 본사로 발령받은지 2년만에 대리 직급과 함께 업무를 맡겨 주어으면 호봉도 많이 올려주는 세심한 배려를 저한테 주는 영광을 주는 동시에 회사에 입사한지 12년만에 과장이라는 직급을 주시였다

너무나 고마웁고 감사한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회사 (주)대우건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한것은  같이 교육을 받던 18명의 탈북자들이 이 땅에서 유명한 대기업에 배치 받아을 때 전 건설회사로 배치 받아지만 내가 제일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다고 비아냥 거리던 그친구들이 대기업회사생활에서 벗어나서 에전의 나처럼 신용카드의 덫에서 신용불량자로 허덕이고 숨가쁜 생활을 하고 있지만 18명중 유일하게 12년동안 지금 현재까지도 회사생활 을 하게 하여주신 (주)대우건설이 고마웁고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처음 회사에 입사 하여을때에 나의가정을 방문하여 나의 가정생활에 필요한 가전제품을 구해 주시였고 저의 결혼식도 회사의 사비로 해주신 회사를 생각 할 때 홀로 현장에서 일하면서 흘린 비지땀이 황금땀으로 생각하니 너무나 자랑스럽고 자유민주주의 시장체제인 한국땅에서 잘 적응 하게 도와주신 나의아내와 회사 임직원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다고 생각 한다

과연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힘으로 가능이나 하여을까

나는 자신 있게 말하고 쉽다 (주)대우건설만이 나를 강하게 행복하게 감사하게 만들었으면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법을 가르치여 다고 말한다

내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입국한지도 13년 한회사에서 12년동안 지금현재 근무하면서 느낀것은 나를 비롯한 우리 탈북자들이 가지고 있는 허황된 망상중 “돈에대한 지나친 집착” “정착성공욕구에 대한 강한집착”을 가지면 백이면 백이 실패하고 페인이 된다는것을 뼈저리게 경험 하여다는것을 말하고 쉽다

그것은 돈에대한 지나친 집착을 가지면 돈의 노예가 되버리고 나중에는 나처럼 신용 불량자의 굴레에 억매이게되고 정착성공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되면 꾸준함과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고 회사생활도 장기적으로 하지 못하고 이회사 저회사로 떠돌아다니게 된다는것을 말하고 된다

주위에서 저보고 이사회에 정착 하는데 성공 하여다고 말하지만 전 아직 멀어다고 겸손하게 말하게 되는데 진정한 정착 성공을 하려면  앞으로도 더욱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더욱 열심히 하게 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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