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두만강 3
작성자 비공개 ㆍ추천: 1  ㆍ조회: 1229
작성일 2017-07-07 (금) 20:10
내 짐은 가벼웠다. 20여 년 삶의 편린들이 박제된 사진첩도, 뒤를 한 번쯤 살펴보고 나서야 썼던 비밀 일기장도 남겨두었다. 베개처럼 두터운, 매일 애용하던 "조선말대사전"도, 그 갈피에 남겨두었던 메모들과도 작별했다. 도마뱀이 자기 꼬리를 자르듯 내 분신들을 버렸다. 미지의 앞날은 그 물건들로 추억들을 낚시질할 가능성에 대해 침묵했고, 지금 그런 바람은 나에게 사치였다. 가다가 내가 죽는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기우이고, 내가 산다면 대신 나의 과거로 돌아가 볼 타임머신을 잃는 셈이다. 단지 애써 남겨 놓은 기억들에 의지해 그 과거의 메마른 우물 속에서 흐려진 몇 방울 에피소드들만 건져낼 것이다.

가야 할 곳은 회령이다. 80km 거리이다. 거긴 중국과의 접경 도시이다. 여행증명서 없는 도망자의 새벽은 실명한 이가 처음 걷는 산길과 같다. 어떤 검문소에서 걸리게 될지, 혹은 보위원에게 불시에 체포될지 아무 것도 모른다. 전혀 아는 것이 없다는 앎만큼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국경을 넘는 이들이 많아지니, 보위부와 보안서에서 검문소를 4개로 늘렸다고 들었다.

이것들을 무사히 통과할 확률은 얼마일까? 그것 또한 알 수 없다. 몰래 통과한 자와 저지당한 자들의 숫자를 안다고 하더라도, 시도했던 자들에게 닥쳤던 변수는 말 그대로 가변적이니까.

ㅤ결국 마지막 검문소에서 걸렸다. 위로 찢어진 작은 뱀눈을 가진 보위원은 여행증명서를 가진 무리 속에 섞여 몰래 통과하려는 나의 시도를 단번에 무산시켜버렸다. 너무 과잉 포장된 “자연스러움”은 부자연스러운 법이다.

"식량을 구하러 갑니다"

"아무리 그래도 교활하게 빠져나가는 건 용납 안 돼!"

다행히 내 연기에 속았는지, 아직은 체포 지시가 전달되지 않았는지 포승줄에 묶거나 수갑을 채우진 않았다. 대신 고향으로 가는 대형 화물차의 짐칸에 던져졌다. 그 "뱀눈"은 그 운전사에게 나를 구역 보안서까지 데려가라고 했다. 검문소가 보이지 않는 산모퉁이에서 나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돌부리에 무릎이 부딪쳐 찢어지면서 빨간 피가 줄줄 흘렀다. 통증이 찌릿찌릿 뻗어 심장을 꼬집었다. 급히 상처를 동여매고 검문소를 멀리 에돌아 도로에 나섰다. 10여 분 후에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회령까지 도착했다. 첫 관문은 통과한 것이다.

브로커의 집에 도착하니까 그는 뒤뜰과 연결된 안쪽 쪽방에 나를 숨겼다.ㅤ
   
이름아이콘 탄산수
2017-07-19 12:11
도마뱀 꼬리 자르듯 나의 분신들을  버렸다는 대목  계속 가슴을 울리네요,
어디선가 봤던 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털어 비울때만이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고....

ps : 문법이 대단하십니다
   
♡    님의 한마디 아름다운 댓글이  작성자 님과 우리 모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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