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경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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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21:41
어느 날 문득 생각 해 보니 내가 돈에만 미쳐 가지고 직업 교육을 안받았더군요.
그때에야 비로소 정신 차리고 학원을 다니면서 결혼 정보 사업에 열정을 바쳤습니다만 세상 무슨 일이나 시작 할 때는 다 잘 될것 같은데 맘 처럼 안되더군요.
미팅을 계속 시켜도 본인들끼리 만나다 거의가 헤어질 뿐 도저히 진전이 없으니 남들 보기에는 엄청 바쁘게 다니는것 같은데 결과가 없는거예요.
어떤 여자는 밥 얻어 먹는데 재미 붙었는지 몇십명째 만나기만 하고, 다 싫다고 하니 어찌 보면 모델로 쓰자고 회원 가입 시킨것 같구요.
남자들도 얼마나 눈들이 높은지 전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겁니다.
사실 중이 제머리도 못 깍은 주제에 이런 일을 하자니 만나는 여자보다도 본인에게 더 신경을 쓰는 등, 좋은 날보다 안좋은 날들이 더 많더군요.
게다가 결혼 보다도 애인 대행을 요구하는 남자 회원들까지 있어 도대체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니 일 하기가 보통 힘들지 않았습니다.
일이 잘 되게 해야 겠다고 책도 많이 보고 여러가지 사람 보는 법도 익히니까 커풀 미팅 사업이 조금씩 좋아 지는것이 보이더군요.
사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정말 매일 3~4 회씩, 희망도 없이 사람만 마주 세우다보니 당장 그만 두고 싶은 생각만 불쑥 불쑥 들더군요.
그래도 그 가운데 미팅으로 만나 재미나게 사는 분들도 몇쌍 됩니다만 300만원 받아서 업소에 200 만원 넣고 내가 100만원을 가진대도 문제는 오랜 시간이 필요 하고, 또 기껏 마주 세워 놓으면 본인들 끼리 문제가 터져 싸울 때 마다 밤중이고 새벽이고 전화 옵니다.
이런 저런 문제를 제가 어찌 본인들 만큼 알겠습니까? 그나마 혼자 였을 때니 한 밤중에 전화 오면 받아라도 주었습니다.
이 일도 결국은 저에게 맞지가 않아 몇달 만에 그만두다나니 손해 보는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젊은 그 두 친구 청년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또 찾은 일이 한일직업전문학교팀장이라 우리 새터민들을 직업 교육 받게 하는 일 이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래도 넘어 오는 우리 탈북자들이 꽤 있었는데 날이 갈 수록 그 수자가 적은것 만치 학생들 모집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 우리 새터민들과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건강이 안 좋아 많이 아픈 사람들도 있었죠.
너무도 힘들게 사선을 헤쳐 오며 병을 만나 성한 사람들이 얼마 안 되는 것 같더군요.
6개월 동안 한일 직업전문학교 일을 하면서 참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 때 마다 밥도 사주고, 간식들도 간간히 마련하느라 한 때 피 같이 번 내 주머니 돈도 어지간히 털어 썼습니다.
그러다 어느날은 갑자기 급한 수술 환자가 있을 때 통장에 남은 돈이 거의 없어 러시안 캐시 돈을 500만원 빌려 가지고 한 언니의 수술비를 대주었는데 석달 동안 일 해서 그 돈을 물면서 개도 안물어 가는 돈 벌기는 힘들고 충동적으로 쓰기는 참 쉽다는것도 느꼈구요.
어느 토요일 교사 아카데미에 갔는데 XXX 교장선생님이 왜 하필 사람 도 없는데 그런 일을 하냐고 우리 맘 합쳐서 대안학교에서 한번 열심히 일해 보자고 건의 하더군요.
아마 직업 학교 일이 나의 한계 일 것이라고 나름 생각하고 있던 갈등의 시기여서 인차 대안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좋더군요.
북에서 이미 십수년을 해 왔던 교사 일이라 내 경험을 살려서 잘 해 보리라 맘먹고 정말 아주 짐싸들고 학교에 가서 먹고 자고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중국 말 밖에 모르는 애들에게도 아빠 엄마와 떨어져 있으니 애틋한 사랑을 주면서 내 딸 같이 내 아들같이 하나 하나 부진 과목에 집중하여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한달이 되서 월급 얘기가 나오자 교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는 꾸리기가 우선 이니 교사들이 몇 달만 더 고생하고 월급은 적금 했다 생각하셨다가 한꺼번에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곧이 곧 대로 믿고 일을 하였습니다.
2011년 7월 1일부터 2012년 1월이 되어서 더는 월급 없이 살아 갈 수가 없다고 교사들 3명이 항의를 하자 교장이 정 힘들면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자기는 한국 선생님들의 봉사 활동으로 학교를 이어 가겠다는겁니다.
돈은 후에 준다고 하면서 ~~~ 그리하여 월150을 받기로 하고는 7개월 동안 일하고 그나마 사례금 200만원을 받고 그냥 나왔습니다.
그 다음 부터 판문점 트러블 회사에서 가이드 일을 했죠.
그런데 그 일은 일당 7만원 받고 둬 시간만 일하면 낮1시에 일이 끝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거예요. 그래서 오후 3시 부터 10 까지 매일 전철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책벌레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하여 반년만에 음악 심리지도사 자격증 3급,과 2급을 따냈습니다.
그 때 부터 지금 까지 음악 치료사로 서울 바닥이 좁다 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대안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은 그 대안학교가 어느 교회 학교로 넘어가게 되면서 돈 한푼 못 받고 소송만 제기하고는 2년 째 못 받은 돈 찾겠다고 법원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죄는 지은대로 가는가 봅니다. 나이 오십도 안된 XXX 교장선생님은 남편도 정신 병원에 보내고, 참 말 년에 학교도 그렇게 되고 법원에 끌려 다니느라 체신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잘 살자고 왔는데 이런 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 참 구차 합니다.
앞으로는 색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오면서 그 과정들에 있었던 에피 소드 들을 하나씩 올려 보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정신 차리고 학원을 다니면서 결혼 정보 사업에 열정을 바쳤습니다만 세상 무슨 일이나 시작 할 때는 다 잘 될것 같은데 맘 처럼 안되더군요.
미팅을 계속 시켜도 본인들끼리 만나다 거의가 헤어질 뿐 도저히 진전이 없으니 남들 보기에는 엄청 바쁘게 다니는것 같은데 결과가 없는거예요.
어떤 여자는 밥 얻어 먹는데 재미 붙었는지 몇십명째 만나기만 하고, 다 싫다고 하니 어찌 보면 모델로 쓰자고 회원 가입 시킨것 같구요.
남자들도 얼마나 눈들이 높은지 전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겁니다.
사실 중이 제머리도 못 깍은 주제에 이런 일을 하자니 만나는 여자보다도 본인에게 더 신경을 쓰는 등, 좋은 날보다 안좋은 날들이 더 많더군요.
게다가 결혼 보다도 애인 대행을 요구하는 남자 회원들까지 있어 도대체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으니 일 하기가 보통 힘들지 않았습니다.
일이 잘 되게 해야 겠다고 책도 많이 보고 여러가지 사람 보는 법도 익히니까 커풀 미팅 사업이 조금씩 좋아 지는것이 보이더군요.
사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지만 정말 매일 3~4 회씩, 희망도 없이 사람만 마주 세우다보니 당장 그만 두고 싶은 생각만 불쑥 불쑥 들더군요.
그래도 그 가운데 미팅으로 만나 재미나게 사는 분들도 몇쌍 됩니다만 300만원 받아서 업소에 200 만원 넣고 내가 100만원을 가진대도 문제는 오랜 시간이 필요 하고, 또 기껏 마주 세워 놓으면 본인들 끼리 문제가 터져 싸울 때 마다 밤중이고 새벽이고 전화 옵니다.
이런 저런 문제를 제가 어찌 본인들 만큼 알겠습니까? 그나마 혼자 였을 때니 한 밤중에 전화 오면 받아라도 주었습니다.
이 일도 결국은 저에게 맞지가 않아 몇달 만에 그만두다나니 손해 보는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젊은 그 두 친구 청년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또 찾은 일이 한일직업전문학교팀장이라 우리 새터민들을 직업 교육 받게 하는 일 이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래도 넘어 오는 우리 탈북자들이 꽤 있었는데 날이 갈 수록 그 수자가 적은것 만치 학생들 모집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 우리 새터민들과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건강이 안 좋아 많이 아픈 사람들도 있었죠.
너무도 힘들게 사선을 헤쳐 오며 병을 만나 성한 사람들이 얼마 안 되는 것 같더군요.
6개월 동안 한일 직업전문학교 일을 하면서 참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 때 마다 밥도 사주고, 간식들도 간간히 마련하느라 한 때 피 같이 번 내 주머니 돈도 어지간히 털어 썼습니다.
그러다 어느날은 갑자기 급한 수술 환자가 있을 때 통장에 남은 돈이 거의 없어 러시안 캐시 돈을 500만원 빌려 가지고 한 언니의 수술비를 대주었는데 석달 동안 일 해서 그 돈을 물면서 개도 안물어 가는 돈 벌기는 힘들고 충동적으로 쓰기는 참 쉽다는것도 느꼈구요.
어느 토요일 교사 아카데미에 갔는데 XXX 교장선생님이 왜 하필 사람 도 없는데 그런 일을 하냐고 우리 맘 합쳐서 대안학교에서 한번 열심히 일해 보자고 건의 하더군요.
아마 직업 학교 일이 나의 한계 일 것이라고 나름 생각하고 있던 갈등의 시기여서 인차 대안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마냥 좋더군요.
북에서 이미 십수년을 해 왔던 교사 일이라 내 경험을 살려서 잘 해 보리라 맘먹고 정말 아주 짐싸들고 학교에 가서 먹고 자고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중국 말 밖에 모르는 애들에게도 아빠 엄마와 떨어져 있으니 애틋한 사랑을 주면서 내 딸 같이 내 아들같이 하나 하나 부진 과목에 집중하여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한달이 되서 월급 얘기가 나오자 교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는 꾸리기가 우선 이니 교사들이 몇 달만 더 고생하고 월급은 적금 했다 생각하셨다가 한꺼번에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곧이 곧 대로 믿고 일을 하였습니다.
2011년 7월 1일부터 2012년 1월이 되어서 더는 월급 없이 살아 갈 수가 없다고 교사들 3명이 항의를 하자 교장이 정 힘들면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자기는 한국 선생님들의 봉사 활동으로 학교를 이어 가겠다는겁니다.
돈은 후에 준다고 하면서 ~~~ 그리하여 월150을 받기로 하고는 7개월 동안 일하고 그나마 사례금 200만원을 받고 그냥 나왔습니다.
그 다음 부터 판문점 트러블 회사에서 가이드 일을 했죠.
그런데 그 일은 일당 7만원 받고 둬 시간만 일하면 낮1시에 일이 끝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거예요. 그래서 오후 3시 부터 10 까지 매일 전철 타고 다니면서 열심히 책벌레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공부하여 반년만에 음악 심리지도사 자격증 3급,과 2급을 따냈습니다.
그 때 부터 지금 까지 음악 치료사로 서울 바닥이 좁다 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대안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은 그 대안학교가 어느 교회 학교로 넘어가게 되면서 돈 한푼 못 받고 소송만 제기하고는 2년 째 못 받은 돈 찾겠다고 법원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죄는 지은대로 가는가 봅니다. 나이 오십도 안된 XXX 교장선생님은 남편도 정신 병원에 보내고, 참 말 년에 학교도 그렇게 되고 법원에 끌려 다니느라 체신이 말이 아니더라구요.
잘 살자고 왔는데 이런 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 참 구차 합니다.
앞으로는 색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오면서 그 과정들에 있었던 에피 소드 들을 하나씩 올려 보렵니다.